[김성종의 망각의 저편] 항미원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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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추리문학관 관장

얼마 전 중국의 시진핑 주석은 중국이 6·25 전쟁에 참전한 것을 두고 “위대한 항미원조(抗美援朝) 전쟁이었다”고 자화자찬했다. 말 그대로 해석하면, 미국에 저항해서 조선을 지원한 위대한 전쟁이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필자의 경험에 의하면 그것은 분명히 한국을 침략한, 그래서 한국민을 전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은 참혹한 전쟁이었다. 당시 태어나지도 않아 경험이 없는 시 주석은 그 전쟁으로 인해 가엾고 아무 힘도 없는 한국민이 겪어야 했던 그 참담한 고초를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1950년 6월 26일 주한 미국 대사 무초는 이승만 대통령을 찾아갔다. 그 자리에서 그는 한 나라의 대통령이 국가 위기 앞에서 그토록 죽음을 두려워하는 모습을 보고 적잖게 실망했다. 이 대통령은 서울 시민들을 그대로 둔 채 혼자 서울을 빠져나갈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이다. 무초는 대통령이 도망간 것을 알면 전 육군은 싸워 보지도 못한 채 무너지고 말 것이라며 간곡히 그를 만류했다. 그러나 이 대통령은 떠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았고, 무초는 혐오감에 차서 이렇게 소리쳤다. “좋습니다! 대통령 선생! 가시려거든 가십시오! 본인 뜻대로 하세요! 어쨌든 저는 가지 않겠습니다!”

中 시진핑, 6·25 참전 ‘위대한 전쟁’ 자찬
경험하지 않은 전쟁이라 참혹함 모를 것
‘한반도 침략군’ 역사적 사실은 변하지 않아
고통 안긴 한국민에게 진심 어린 사죄를

무초의 강경한 태도에 놀란 이승만은 불쌍한 어조로 “그날 밤은 당장 떠나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다. 하지만 무초가 나가자마자 대통령은 교통부 장관에게 즉시 전용 열차를 대기시켜 놓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6월 27일 새벽, 전쟁이 일어난 지 채 50시간도 되지 않은 깜깜한 밤중에 서울을 몰래 빠져나갔다. 떠나기 전에 대통령은 그 사실을 무초 대사에게 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무초는 나중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그가 이미 떠난 뒤에야 도망갔다는 것을 알았다. 대통령의 그와 같은 처사로 이후 수개월간 나는 유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다. 왜냐하면 그가 나보다 먼저 서울을 떠났기 때문이다.”

유엔군의 북상에 맞서 중국 인민지원군(중공군)은 ‘미국과 싸우고 북한을 도와 가정을 보호하고 나라를 지킨다(抗美援朝 保家衛國)’는 명분을 내세워 1950년 10월 19일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북·중 국경 경계선인 압록강을 도하하기 시작했다. 새까만 인파가 차디찬 강물을 비추는 달빛을 뒤덮었다. 중공군의 전투에 대한 열정은 한껏 고무되어 있었다. 어떤 병사는 심지어 자신의 이름을 ‘부산(釜山)’으로 개명할 정도였는데, 유엔군을 부산까지 몰아붙여 바다로 쫓아내겠다는 의지였다.

마오쩌둥은 “미국을 비롯한 모든 제국주의는 종이호랑이에 불과하다”고 경멸했다. 이 한마디는 중공군이 어떤 어려움도 두려워하지 않고 승리의 확신을 갖는 데 엄청난 작용을 했다. 중국 문화의 정수는 근본적으로 정신력에 대한 숭배에 있다. 정신력은 영원히 물질력의 상위에 있다는 관점은 중국인들의 가슴속 깊이 뿌리박혀 있는 것이다.

1950년 10월 21일 오전 9시 군사위 부주석인 펑더화이(彭德懷)는 김일성과 만난 자리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중국 정부가 출병을 결정했고 군부대가 이미 압록강을 도하한 사실을 알렸다. 인민지원군의 선두 참전부대 6개 군 35만 명이 곧 도착할 것이며 마오쩌둥이 그 밖에도 6개 군을 예비대로 준비해 두었다고 말했다. 그 소식에 김일성은 좋아 어쩔 줄 모르며 이렇게 환호했다고 한다. “정말 잘됐습니다! 정말 잘됐습니다! 조국에 전폭적인 지원을 보내 주신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 동지에게 감사드립니다!”

한반도로 진격한 중공군은 한국인들에게 비교적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는데, 다음과 같은 삼대기율(三大紀律)을 장병들에게 각별히 주지시켰기 때문이었다. △모든 행동은 지휘에 따른다 △대중의 물건은 바늘 하나 실 한 올이라도 갖지 않는다 △모든 노획품은 공공의 물건으로 한다. 여기에 더해 팔항주의(八項注意)라는 것도 있었다. △말을 부드럽게 한다 △거래를 공평하게 한다 △빌린 물건은 돌려준다 △망가뜨린 것은 변상한다 △남을 때리거나 욕하지 않는다 △농작물을 짓밟지 않는다 △부녀자를 희롱하지 않는다 △포로를 학대하지 않는다. 그래서였는지 당시 중공군에 대한 나쁜 평판은 들어 보지 못했다. 오히려 우리 군경이 여기저기서 불쌍한 양민들을 대량 학살했다는 흉흉한 소문만 떠돌았다.

그렇다 하더라도 역사적 진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 어떤 대의도 중공군이 한반도를 침공한 침략군이라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그들의 침공 때문에 한국민은 이후 1·4 후퇴라는 길고 참혹한 피난생활을 겪어야 했다. 개인적으로도 나의 가족이 겪은 참담한 고통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중국은 “위대한 전쟁”을 말하기 이전에 한국민들에게 진심 어린 사죄부터 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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