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 하늘길’ 물들이는 ‘왕후의 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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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가야불교 트레킹

한 여행객이 김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분산성 옆에서 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김해에 가면 ‘가야불교’라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우리나라에 불교가 도래한 것은 4세기 고구려 소수림왕 때가 아니라 1세기 가야 수로왕 때였다고 김해 사람들은 생각하기 때문이다. 인도 아유타국에서 바다를 건너와 수로왕과 국제결혼한 허황옥(허왕후)이 불교를 갖고 왔다는 주장이다. 김해에는 실제 가야불교와 관련한 유물, 유적은 물론 설화가 적지 않다. 가야불교의 흔적을 찾아 김해를 한 바퀴 둘러본다.

왕과 신선이 수담 나눈 초선대
은하사 돌다리에 새긴 ‘쌍어’
김해평야 한눈에 담는 분산성
걸음마다 수로왕·허왕후 흔적

■초선대와 마애불

경건하면서 신령스러운 분위기가 흐른다. 이른 아침 햇살이 만들어내는 환상적인 빛이 주는 착각일까. 말라죽은 지 오래 돼 보이는 하얀 고목은 성스러움을 더 강하게 만들어준다.

어방동 초선대는 실제로 그런 곳이다. 임금과 신선이 바둑을 두며 성스러운 대화를 나눴고, 가야불교의 짙은 흔적인 마애불과 불족이 남아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초선대 이야기는 조선 시대의 여러 서적에 나온다. <고려사>에는 ‘거등왕이 초선대에 올라 칠점산 담시선인을 부르자 담시선인이 배를 타고 왔다’라고 적혀 있다. 이곳에는 거등왕이 앉았다는 연화석과 바둑판으로 추정되는 바위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초선대는 과거에는 바다 한가운데 섬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담시선인은 학을 타고 칠점산에서 바다를 건너왔다는 게 전설의 주장이다. 봉우리가 7개였다는 칠점산에는 지금 김해국제공항이 들어서 있다. 현재는 일곱 봉우리 중에서 한 개만 남아 있다. 초선대에서 남동쪽으로 낙동강 너머를 바라보면 김해국제공항이다. 비행기 한 대가 고고하게 하늘을 나는 커다란 학처럼 창공으로 비상한다.

거등왕은 수로왕과 허왕후가 낳은 10남2녀 중 장남이었다. 둘째, 셋째 아들은 김해허씨가 돼 두 여동생을 데리고 일본으로 떠났다. 나머지 일곱 남동생은 지리산에 들어가 성불해 하늘로 올라갔다. 그곳에는 칠불사가 건립됐다.

초선대에서는 옛날 대한해협이 한눈에 보였다. 그 너머로 일본 대마도가 나타나고, 일직선으로 후쿠오카 등 규슈까지 연결된다. 거등왕은 초선대에서 망망대해를 바라보며 일본으로 건너간 두 왕자와 두 공주를 그리워했을지 모른다.

초선대 뒤에는 조그마한 사찰인 금선사가 있다. 금선사 왼쪽 큰 바위에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김해 사람들은 이 마애불이 거등왕이나 허왕후의 오빠 장유화상의 초상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전체적인 형상을 볼 때 고려시대 아미타여래일 가능성이 높다.



■신어산과 은하사

깊은 산속에 조그마한 연못이 보인다. 작은 불상 하나가 연못 한가운데에서 산 아래를 지그시 내려다본다. 연못 위에는 하얀 돌다리가 놓여 있다. 돌다리 위에서 물고기 두 마리가 신나게 뛰어놀고 있다. 가야불교를 상징하고 인도문화의 영향을 보여준다는 ‘쌍어’다.

돌다리를 건너면 돌계단이 나타나고 그 뒤로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고찰 은하사가 등장한다. 절 뒤로는 신성한 기운이 풍겨나는 높은 산이 서 있다. 김해의 진산인 신어산이다.

은하사는 수로왕 때 여동생 허왕후를 따라 인도 아유타국에서 온 장유화상이 창건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857년 은하사의 누각 취운루를 새로 지은 일을 기념해 새긴 ‘취운루 중수기’에 그런 내용이 나온다. ‘가락국 허왕후는 천축국(인도)에서 오빠 장유화상과 함께 왔다. 수로왕은 은하사, 명월사 그리고 작은 암자들를 창건하라고 명했다. 이를 부암(父菴), 모암(母庵), 자암(子庵)이라고 불렀다. 이는 허왕후의 소원이었다.’

은하사는 과거 서림사라고 불렸다. 신어산 서쪽에 서림사, 동쪽에 동림사를 지어 가야의 번영을 기원했다는 것이다. 신어산은 예전에는 은하산이라는 이름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절도 은하사라고 부르게 됐다.

대웅전 대들보와 대웅전 불단에는 용의 머리에 물고기 몸통인 신어, 그리고 물고기 두 마리가 서로 마주보는 쌍어 그림이 새겨져 있다. 대웅전 외벽 벽화에는 장유화상과 지리산에서 성불한 수로왕 일곱 왕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대웅전 오른편 삼성각에는 장유화상의 얼굴 그림이 봉안돼 있다.



■분산성과 해은사

젊은 아버지와 어린 아들이 다정한 모습으로 성곽 위를 걸어간다. 그 아래로 김해평야는 물론 시내가 한눈에 들어온다. 시원한 풍광은 코로나19 때문에 답답하게 막혔던 가슴을 호쾌하게 뚫어준다.

김해에 가면 어느 위치에서나 분성산 정상에 뚜렷하게 각인 돼 있는 산성을 볼 수 있다. 가야 시대에 쌓은 것으로 추정되는 분산성이다. 언제 누가 왜 이 성을 쌓았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분성산에서는 가야 이전 청동기시대의 마을 흔적은 물론 삼국시대 성벽 흔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분성산에는 허왕후의 전설이 서린 작은 사찰, 해은사가 있다. 허왕후는 배에 파사석탑을 싣고 가야에 무사히 도착한 뒤 풍랑을 막아준 바다의 신에게 감사를 드리면서 이 절을 지었다고 한다. 그래서 해은사 대왕전에는 특이하게도 수로왕과 허왕후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

분산성 일대는 큰 힘을 들이지 않고 걸을 수 있는 ‘가야하늘길’ 트레킹 코스다. 늦은 오후 해질 무렵 분산성 풍경은 찬란하다 못해 황홀할 지경이다. 이곳에서 바라보는 노을은 입을 다물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

서서히 노을이 지면 성곽에 붉은 빛이 반사된다. 산세를 타고 세워진 성곽은 구불거리는 용을 닮았다. 그래서 노을 때 분산성은 마치 승천하는 용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한다.

조선 시대까지만 해도 김해평야 일대는 바다였다. 지금 김해 시내의 상당부분도 바다였다. 인도에서 온 허왕후는 수시로 이곳에 올라와 고향 쪽 바다 노을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래서 분산성 노을을 ‘왕후의 노을’이라고 부른다. 물론 지금은 모두 매립돼 김해에서는 바다를 볼 수 없다.

한편 김해에는 이밖에도 파사석탑, 감로사, 부은사, 모은암, 왕후사지 등 가야불교 관련 유적이 널려 있다. 부산 흥국사와 경남 밀양 만어사, 하동 칠불사, 남해 보리암 등에도 가야불교의 흔적이 존재한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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