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와 함께하는 고개와 길] 693. 구포 말등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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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 등 푹신하듯 걷는 것도 푹신 보는 것도 푹신

구포 말등고개. 말등처럼 생겼다. 고갯마루에서 구포, 모라, 만덕 등 네 갈래로 갈라진다. 모라 낙동강 재첩국이 이 고개를 넘어 구포로 왔고 초읍이며 구덕으로 갔다. 재첩국 한가득 담긴 양동이를 이고서 고개 넘던 어머니들이 있었기에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있다. 위쪽부터 구포시장에서 본 말등고개, 말등고개에서 본 구포, 구포3동 시랑골 자리를 가리키는 이은호(왼쪽) 선생과 최동성 대표.

구포 말등고개는 말등처럼 생긴 고개다. 말등이 푹신하듯 고개가 푹신하다. 걷는 것도 푹신하고 보는 것도 푹신하다. 구포 진산인 주지봉 바로 아래 있어서 구포 어디에서도 엔간하면 보인다. 구포 사람 너그러운 심성은 말등고개에서 비롯한다. 지나가며 간간이 봐도 마음이 푹신한데 매일매일 보는 구포 사람은 어련할까. 황소 잔등에 얹는 안장처럼 생겨 질매재라고도 한다. 잔등 안장이 질매다.

주지봉·구포·모라·만덕 네 갈래 길
모라 재첩 아줌마 양동이 이고 넘고
오일장 장꾼 구포장·동래장 다니며
운수사 신도 돌탑 쌓으며 다닌 고개
‘감동진·대리’ 옛 지명 남은 순박한 곳

이은호(58) 선생은 구포 토박이. 역시 심성이 너그럽다. 다쳐서 걷는 게 불편한데도 고갯길 안내에 선뜻 나선다. 이 선생에게 말등고개는 각별하다. 어릴 때 나뭇짐 하러 넘었고 산딸기 따 먹으러 넘었고 눈이 그치면 올가미로 토끼 잡으러 넘었다. 대학과 ROTC 복무를 제외하곤 말등고개가 보이는 구포를 지켰다. 말등고개 아래 여고에서 국어 선생을 했으며 북구 낙동문화원 사무국장을 거쳐 지금은 구포역사문화연구소 소장으로 있다.

말등고개는 사통팔달 고개다. 고개에서 네 갈래로 갈라진다. 정상인 주지봉으로 가는 길이 있고 구포로 가는 길, 전통사찰 운수사가 명소인 모라로 가는 길, 만남의 광장을 지나 만덕으로 가는 길이 있다. 오일장 장꾼이 이 고개를 넘어 구포장이며 동래장에 다녔고 운수사 신도가 이 고개를 넘었다. 운수사 오가는 오솔길엔 한 돌 한 돌 쌓여서 산을 이룬 돌탑이 장관이다. 이은호 선생처럼 땔나무 구하러 고개를 넘는 초동도 수두룩했다. 덕천동에서 고개 넘어 시랑골로 가면 나무가 널렸다. 구포3동 삼정고등학교 일대가 시랑골이다.

“음정골은 음침해서 못 가고 시랑골로만 다녔어요.” 구포 일대는 무슨 골, 무슨 골 하는 지명이 지금도 꽤 쓰인다. 말등고개를 가운데 두고 이쪽은 어두침침한 음정골이고 저쪽은 나무가 많던 시랑골이다. 안 그래도 어두침침한 음정골은 제사 지내던 무당들이 터를 잡아 어린 이 선생에겐 더 무서웠다. 구포2동에서 말등고개로 이어지던 시랑골은 폭포가 좋았고 구포1동엔 비석골이 있다. 말등고개는 이 모든 골을 품어서 구포 어디에서 봐도 엔간하면 보인다.

그런 말등고개도 주지봉에는 한 수 아래다. 말등고개가 구포 곳곳의 골짜기를 품는다면 백양산이 뻗어 내리다 우뚝 솟은 주지봉은 말등고개를 품는다. 구포 진산이라는 명성이 그냥 얻어진 게 아니다. 말등고개가 말 잔등처럼 생겼다면 주지봉은 거미가 앉은 형상이다. 그래서 거미 주(蛛) 거미 지(蜘), 주지봉이다. 능선 정상 바위는 낭바위. 신라 화랑이 여기서 수련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장롱처럼 생겨 농바위라고도 한다. 오래 가물면 여기서 기우제를 지냈다.

구포 영산도 기념비적인 산이다. 말등고개를 가운데 두고 주지봉과 마주본다. 일제강점기 민족자본으로 구포은행을 세워 일제 자본에 맞섰으며 부산대 초대 총장 윤인구 박사의 부친인 윤상은 선생 묘소가 있다. 영산은 고개 령을 써 영산(嶺山)이 본명이지만 당산을 품은 신령스러운 산, 영산(靈山)으로도 쓴다.

“치유와 위안을 이야기해 주세요.” 고개에 얽힌 추억담을 이야기하던 이 선생이 한순간 숙연하다. 모라 재첩 아줌마 이야기가 나오면서다. 모라 낙동강 재첩국은 이 고개를 넘어 구포로 왔고 초읍이며 구덕으로 갔다. 재첩국 한가득 담긴 양동이를 이고서 고개 넘던 어머니들. 그들이 있었기에 어제보다 나은 오늘이 있다며 등이 구부러질 대로 구부러져 생을 마감했던 어머니들을 치유하고 위로하는 글을 당부한다.

‘소 여인숙.’ 이야기는 한우로 이어진다. 북구청 근처에 소 잡는 도살장이 번성하던 시절 이야기다. 멀리서 온 소를 하룻밤 재워 주던 여인숙이 있었다. 물 잔뜩 먹여 중량을 늘리려던 잔꾀에 대한 대처이기도 했다. 부위별로 나뉜 고기는 아주머니 함지박에 담겨서 말등고개를 넘었다. 재첩국 가득 채운 양동이보단 덜했지만 소고기 함지박도 꽤 무거웠다. 그 모진 세월을 견뎌낸 어머니들이야말로 그 시절 진정한 영웅이었다.

“물이 좋아서 자주 왔고 놀기 좋아서 자주 왔지요.” 동행한 최동성 ‘우리소리 우리가락 어화둥둥’ 대표에게도 말등고개는 각별하다. 어린 시절 고개 아래 약수터로 곧잘 왔다. 말등고개에서 운수사 방향으로 가는 길에서 들려준 구포 옛 노래는 여운이 오래간다. 예사로 듣는 소리가 아니었다. 뒤따라 걷는 내 어깨가 저절로 들썩댈 정도였다. 우리 어머니의 어머니, 아버지의 아버지도 그랬을 것이다. 앞 사람은 선창하고 뒷사람은 추임새 넣으며 이 고개를 넘었을 것이다. 최 대표는 구포감동진별신굿이며 구포대리지신밟기 같은 구포 옛 노래 복원과 재생, 공감대 넓히기에 앞장선다.

구포는 순박하다. 그 증명이 지명이다. 말등고개가 그렇고 무슨 골, 무슨 골이 그렇고 지금도 일상적으로 쓰이는 옛 지명이 그렇다. 감동진은 구포 옛 지명이고 대리는 구포에서 가장 컸던 마을이다. 영산 아래 삼경장미아파트와 구포시장 사이에 있다. 당산도 여기 있다. 당산 옆 너른 공터에선 말을 키웠다. 키우는 말을 타고 넘던 고개라 해서 말등고개라는 이야기도 들린다. 이은호 선생은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이 주로 살았다고 회고한다. 장미아파트 뒤로 해서 영산을 거쳐 말등고개, 주지봉으로 가도 된다. 가파른 게 흠이다.

“말등고개가 순수한 우리말이듯 고개를 넘던 사람들도 참 순수했어요.” 구포 사람과 모라 사람이 아침저녁 다녀 딴딴해진 옛길, 말등고개. 지금도 고개 능선에 올라서기 전까진 몇 번이나 쉬어서 갈 만큼 가파르다. 가파른 길을 짐까지 한 보따리 이거나 지고서 넘던 어머니를 생각하고 아버지를 생각하면 어디 가서 코로나 때문에 힘들단 말 꺼내기도 남사스럽다. 그나저나 이 선생은 가파른 산길을 날아다닌다. 다쳤단 사람이 맞나 싶다.

▶가는 길=도시철도 덕천역 9번 출구로 나오면 된다. 다비치안경 오른쪽으로 올라가 주공1단지 105동 뒤편 보광사와 양덕여중 샛길로 들어설 것. 약수터 두 군데를 지나면 말등고개다. 바로 옆에 체육공원과 주지봉 이정표가 있어 알아보기는 쉽다.

동길산 시인 dgs1116@hanmail.net

이 기획은 부산시 지역신문발전지원사업의 도움을 받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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