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지역 문학을 향유하는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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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은덕 소설가

다른 예술품과 마찬가지로 문학 역시 완성품이 되어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 작품은 더 이상 작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출판시장에 나온 작품은 다양한 독자들을 만나서 책이 갖는 운명, 즉 발터 벤야민이 의미하는 ‘사후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저자의 의도가 무엇이었든, 그가 작품을 위해 어떤 힘겨운 노력을 기울였든, 독자가 그것을 일일이 헤아리고 살펴야 할 이유는 없다. 시간과 돈을 지불한 독자는 책을 마음껏 감상하고 소비하는 주체이자 향유자가 된다.

지역 문학 놓고 독자 혹평 적어
‘소비 구조’가 그럴 수밖에 없어

동료 작가들 평도 조심스러워
평론가 날카로운 비평 필요해

논쟁과 자극, 더욱 활발해졌으면
상상력·열정의 지역 문학 기대해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역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이 일반 독자의 혹평을 받는 일은 매우 드물다. 만일 어떤 독자가 책값을 지불하고 지역 작가의 시집이나 소설책을 사서 꼼꼼히 읽었다면 그는 그 작가의 팬일 확률이 높다. 베스트셀러도 아닌 책을 구매해서 정독했다는 사실 자체가 지극한 격려이자 응원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보니 지역 작가의 작품에 대한 혹평은 주로 문단 내부 즉 동료 작가나 비평가로부터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작가가 동료의 작품에 대해 비판하는 건 대개 출간 이전에 이루어진다. 책 발간을 앞둔 저자가 동료 작가에게 초고를 보내 피드백을 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출판을 앞둔 시기의 작가는 자주 불안하고 예민해진다. 그래서 동료의 감상평에도 촉각을 곤두세우고 민감하게 반응한다. 문우가 보내준 초고를 비판했다가 갈등을 겪은 경험이 내게도 있다. 시간이 지나고 보니 당시 출간을 앞둔 그 문우에게 필요했던 건 냉혹한 평가가 아니라 격려와 다독임이었다는 걸 알겠다. 지역에서 작품을 쓰는 작가의 희망과 절망의 심리적 롤러코스터를 이제는 이해할 수 있다.

문학평론가의 경우 작가의 작품을 평가하는 스펙트럼이 한층 자유롭고 광범위하다. 애매모호한 칭송으로 일관하는 이른바 ‘주례사 비평’에서부터 두꺼운 평론집 끝자락에 구색 맞추기 식으로 여러 작가의 작품들을 성급하게 재단하고 구분한 후 폄훼하는 비평도 있다. 두 경우 모두 ‘과연 이 작가의 작품(들)을 꼼꼼히 읽은 걸까?’하는 의문이 든다. 그런데 만약 작가가 평론가의 글에 대해 비판이라도 할라치면 그건 논평이 아니라 불만으로 간주된다. 평론가가 아니라면 비평문을 논할 자격이나 능력이 부족하다고 예단하는 게 아닌가 싶다. 하지만 다른 모든 장르의 책이 그러하듯이 평론집 역시 향유의 주체는 독자이며 작가는 그중에서도 전문가 독자층에 속한다.

지역의 삶을 구체적이고 핍진하게 형상화한 작품은 인간과 세계의 보편적 삶의 양태를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견해는 이제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문학 창작의 기본적이고 전통적인 규범이 되었다. 부산 소설의 경우 1970년대와 1980년대의 리얼리즘 소설이 이러한 전범 사례를 제시하고 있다. 요산 선생을 필두로 윤정규, 최해군, 이규정, 정형남 소설가가 리얼리즘에 천착하던 그 시대는 민주화에의 열망과 문학의 사회적 역할이라는 요구가 만나서 민족문학이 절정기를 누리던 시기였다.

지역 소설을 향해 부산 정신 혹은 부산의 맥을 되찾아달라고 요청하는 평론집을 최근에 읽었다. 여러 작가의 소설 세계를 한자리에서 논하기에는 분량이나 내용이 짧아서 아쉬웠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독자에게 외면당하는 지역 소설 시장이 이러한 논쟁적 화두를 계기로 다소나마 활성화되기를 바란다. 무엇보다도 지금의 부산 문학이 보다 활달하고 다채로운 양상으로 뻗어나갔으면 좋겠다. 리얼리즘, 판타지, SF, 추리, 환상 등등 기법이 무엇이든 간에 작가 자신의 상상력과 열정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면 될 일이다. 누구나 자신의 취향과 방식대로 문학을 생산하거나 소비하며 향유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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