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품은 ‘빈집’이 건네는 다섯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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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문화재단 ‘빈방의 서사’

여상희의 ‘집의 순환’. 부산문화재단 제공

빈집, 빈 점포가 예술적 이야기를 품었다.

‘빈방의 서사(敍事), 다섯 가지 이야기’는 부산문화재단이 진행하는 2020 지역문화예술교육기반구축사업 중 하나이다. 노마드 문화예술교육으로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도심 속 빈 공간 다섯 곳을 무대로 펼쳐진다. 사하구 다대포와 장림시장, 서구 아미동 비석마을, 부산진구 초읍동 원당골, 동구 초량동에서 예술가들이 직접 찾아낸 빈집이나 빈 점포가 작품의 주요 소재가 된다. 전시 감상부터 체험까지 온전히 혼자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빈방의 서사’ 현장을 직접 찾아봤다.

자신만의 시간 여행 펼치는
다대포 바닷가 작은 집


■김덕희 ‘시간의 서(書)’

다대포 바닷가 구석에 위치한 작은 집이 시간 여행자를 위한 공간으로 변신했다. 양식장에서 걷어온 파래 냄새가 물씬한 이곳에서 김덕희 작가의 ‘시간의 서(書)’가 펼쳐진다.

두 개의 작은 방에 하얀 모래가 가득하다. 첫 번째 방에서 모래 위에 앉아 지시문이 적힌 책을 편다. 눈을 감고 1분을 세어 보고, 그 1분이 얼마만큼 인지를 책에 쓰거나 그려본다. 다음은 시간 안내자의 도움을 받아 집앞에서 팔봉섬으로 이어지는 방파제를 걷는다. 산책이 끝나면 다시 집으로 돌아와 두 번째 방으로 들어간다. 하얀 모래 방에 놓인 탁자에 앉아 자신만의 시간 서사를 완성한다.

‘시간의 서’는 시간 감각을 새롭게 한다. 자신만의 시간을 마주하는 순간에는 차분해지고, 내게 의미있는 시간을 찾다보면 울컥해지기도 한다. 왼쪽으로 성창기업이 위치한 방파제를 따라 걷다 보면 ‘포구 다대포’를 재발견하는 시간까지 가질 수 있다. ▶14일까지 사하구 몰운대2길 96-1.


54년된 초량동 2층 주택서
설치작품 따라 소리산책


■정만영 ‘되돌아가는 시간 위에 서다’

정만영 작가는 부산 동구 초량동에 숨은 보석 같은 집을 발굴했다. 1966년에 지어진 2층 주택은 지하에 아이들을 위한 수영장으로 추정되는 공간까지 품고 있다. 현 소유주가 오랫동안 방치된 집의 원형을 복구하는 중이라 전시 느낌이 더 특이했다.

정 작가는 이곳에서 ‘되돌아가는 시간 위에 서다’라는 제목으로 체험자를 촉각적 소리 산책으로 이끈다. 집에서 나온 오래된 전축에서 음악을 듣고, 수정산 계곡·사물의 표면·지하 공간의 소리를 담아낸 설치작품을 감상한다. 직접 만든 종이 스피커를 LP판 위에 올리면 연주가 들린다. 마당에서 소리를 채집하는 체험까지 마치면 잊고 살았던 무수한 소리의 존재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14일까지 동구 초량상로 117-8.


누군가의 엄마 아닌 나는?
자아 찾는 초읍 원당골 옥상



■왕덕경 ‘잃어버린 이름’

‘잃어버린 이름-□의 방’은 엄마의 시기를 겪었거나 겪고 있거나 앞으로 겪게 될 사람을 위한 공간이다. 왕덕경 작가는 부산진구 초읍동에서 살았던 경험을 살려 원당골에 위치한 한 주택을 선택했다. 집주인의 손자·손녀가 뛰어놀던 흔적이 남은 옥상에 작가는 두 개의 방을 만들었다. 하나는 엄마만을 위한 이상적인 방이며, 또 하나는 가족과 집안일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 속의 방이다.

현실 속의 방에는 엄마의 이야기를 표현한 작가들의 작품들이 전시돼 있다. 재봉틀로 만든 책상 위에 엄마로 살았던 한 여성의 삶의 기록도 놓여 있다.

이상적인 방은 투명하게 세상과 소통하면서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장소다. 여기에선 포근하게 감싸는 원당골의 기운을 느끼며 누군가의 엄마가 아닌 나의 시간을 보낼 수 있다. ▶13일까지 부산진구 성지로74번나길 6.


장림시장 빈 점포에서 깨우는
나의 신체 감각과 예술 감각


■김보경 ‘사랑의 공간’

김보경 작가는 사하구 장림시장 안 빈 점포에 ‘사랑의 공간’을 만들었다. 숨 쉬기, 스트레칭, 걷기 등 신체 감각과 3m 벽을 따라 걸으며 다양한 재료로 선을 그리며 예술 감각을 깨우게 한다. 작은 쟁반에 다양한 색을 부어 색이 번지고 퍼지는 감도를 체험해서 참가자들이 어떤 색을 선호하는지 발견하도록 했다.

지난달 30일까지 시장 상인과 주민을 대상으로 체험 교육을 했고, 현재는 그 결과물을 전시 중이다. ▶사하구 장림시장7길 89.

천마산 자락 비석마을 마당서
재개발과 도시 생명력 다시보기

■여상희 ‘집의 순환’

여상희 작가의 ‘집의 순환’은 서구 아미동 마을기업 아미맘스가 운영하는 기차집에서 시작한다. 아미맘스 회원의 안내를 받으며 비석마을을 돌아보고 천마산 자락 위 빈집에 들어선다. 돌아가신 집주인 아저씨가 ‘바람도 구름도 쉬어가는 전망대’라 이름을 붙일 정도로 마당에서 보는 풍광이 멋지다.

입구 방에서 비석마을에 대한 영상 기록을 시청한 뒤 집 안 곳곳을 돌아본다. 화물 박스 등을 뜯어서 올린 천장, 벽에 붙은 오래된 <부산일보> 등이 이 집의 세월을 가늠하게 한다. 방 안을 가득 채운 신문지 가루는 재개발 등으로 건물이 사라진 뒤 먼지가 되어 공중에 날리는 모습을 표현한 것이다.

여 작가는 마을 곳곳 옹벽에서 자라는 고사리에 주목했다. 음지 마을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내뿜는 고사리를 창고 안에 옮겨 심어 빈집에 어김없이 찾아드는 자연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림자 속에서 다시 움트는 생명이 앞으로 이 마을에 필요한 풍경이 아닐까 생각했다”고 말했다. ▶서구 아미로12번길 9-20.

예술가의 작업을 통해 도심 빈 공간에 이야기가 채워지고, 그 이야기를 통해 관람객은 도시를 다시 만난다. ‘빈방의 서사, 다섯 가지 이야기’ 관람은 문화예술교육플랫폼(http://bsarte.bscf.or.kr)에서 사전 예약을 해야 한다. 051-745-7284.

오금아 기자 chr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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