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눈 내리는 숲에서 만난 프로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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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책장 빈틈에 세워 둔 달력에는 마지막 한 장이 남았다. '12월'이라는 말을 하면 어느새 마음 한구석에 눈이 내린다. 눈 내린 자작나무 숲길을 홀로 걸어간다.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는 새처럼 뽀드득, 뽀드득 눈을 밟는다. 새하얀 눈의 결정체를 떠올려 본다. 가장 밤이 긴 동지가 오고 동짓달이 떠오르면 곧 크리스마스가 올 것이다. 흰 눈, 벙어리장갑, 그리고 크리스마스트리가 있어 겨울은 아름답다.

케네디 영부인 재클린이 아낀 시인
자연에 대한 애정과 사색의 정서로 충만
삶은 힘들어도 꼭 껴안고 가야 할 현실
눈 내린 숲길에서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

돌아가신 아버지는 연말이 다가오면 우체국으로 가서 연하장을 샀다. 책상을 펴고 앉아 만년필로 손수 축복의 글을 써서 보내셨다. 크리스마스이브에는 맛있는 케이크를 사 와 촛불을 밝히셨다. 아버지는 언제나 그렇게 한 해를 마무리하셨다. 눈이 내린다. 겨울날 마구간에서 태어난 아기 예수는 너무 가난해 아름다운 별이 되었다. 가난이 축복이 되는 신비를 알려준 천사가 걸어간다. 무수히 빛나는 밤하늘의 별은 그의 눈동자를 닮았다. 올겨울에는 코로나19도 잠잠해지고 모든 사람들이 평온하고 건강하게 지내기를 기도한다.

나의 서재에도 흰 눈이 내린다.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내리는 밤 숲 가에 서서’를 읽는다. 시적 화자가 일을 마치고 조랑말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다. 그때 문득 마주친 눈 내린 숲의 풍경은 신비스럽다. 얼어붙은 호수와 숲의 고요는 잠시 죽음을 연상시킨다. 아무 소리도 없이 눈이 흩날린다. 한국어로 번역하면 영시의 고유한 리듬이 사라지지만 그 풍경을 묘사하는 힘은 여전히 살아 있다.

눈 내리는 숲에 선 시적 화자의 고독한 심경이 토로되어 있다. 그는 신비스러운 숲에서 잠들고 싶다.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그러나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들기 전에 여러 마일을 가야만 한다./ 잠들기 전에 여러 마일을 가야만 한다(The woods are lovely, dark, and deep,/ But I have promises to k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 And miles to go before I sleep)’로 끝을 맺는데 ‘deep’ ‘keep’ ‘sleep’과 같은 각운(rhyme)이 서로 어우러지며 시적 여운이 오래 남는다. 영어로 낭송했을 때 더 아름다워 미국에서는 장례식에서 애송되기도 한다. 누군가와 지켜야 할 약속이 있기에 어두운 눈길을 계속 걸어가려는 의지가 빛난다. 고난이 있든 유혹이 있든 우리는 자신들의 길을 걸어가야 한다.

한편, 프로스트는 한국 독자들에게는 ‘가지 않은 길’로 더 많이 알려져 있다. 가을날 숲길을 산책하다가 두 갈래의 길 앞에서 어디로 갈지 고민하는 마음을 표현한 시이다. 어느 길을 선택하더라도 가지 않은 길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이 남기 마련이다. 남들이 가지 않는 외딴길을 결정한 화자의 내면을 가을 풍경과 함께 담은 시이다. 그는 20세기 미국인들에게 시골의 향수를 단아한 시적 리듬에 담아 많은 사랑을 받았다. 도시 문명에 찌든 현대인에게 자연의 여유와 사색하는 정서를 환기시켰다. 특히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아내였던 재클린이 그를 좋아해 백악관 행사에 초대하기도 했다. 우아한 드레스를 입은 그녀가 백발의 시인 곁에 앉아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는 모습은 정겹다.

미국의 정치사에서 재클린의 패션과 스타일은 아주 개성적이었다. 유럽의 고급 패션인 오트 쿠튀르의 감각을 자신의 일상에서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소화했다. 훗날 미국의 퍼스트레이디들이 그녀의 패션을 롤 모델로 삼은 경우가 많다. 사실 백악관을 흰색의 세련된 공간으로 재탄생시킨 것도 그녀의 작품이다. 부엌의 식기나 의상 또는 내부 인테리어까지 혁신을 가져와 미국의 우아한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 그런 그녀가 소박한 시골 시인인 프로스트를 극진히 접대하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그녀는 케네디가 죽은 후에도 용기를 잃지 않고 자신의 길을 걸어갔다.

이런 품격 있는 정치 스타일이 한국에도 필요하다. 국민들의 수준은 높은데 정치의 격은 여전히 낮아 보인다. 거친 언어와 상대를 적대시하는 방식이 난무하는 듯하다. 때로는 지역과 계층 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측면도 있다. 그들의 가슴속에 흰 눈송이를 뿌려주고 싶다.

프로스트는 ‘자작나무(Birches)’ 시에서 ‘이 세상은 사랑하기에 알맞은 곳/ 이 세상보다 더 나은 곳이 어디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라고 말한다. 소년이 자작나무 가지를 타고 하늘가에 닿았다가 다시 지상으로 내려오는 동작을 보여준다. 삶이 힘들어 죽음을 동경하거나 회피하고자 할지라도 다시 현실로 돌아와 이 순간을 소중히 껴안는 것이 중요하다. 지구별에서의 삶이 어둡고 추울지라도 희망을 안고 우리는 눈 내린 숲길을 계속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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