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사적 보복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조선 정조 22년(1798년) 지금의 경북 영덕군에 있는 영해(寧海) 고을에서 신사량이라는 이가 한 여인을 칼로 찔러 죽였다. 신사량의 며느리가 이웃인 신천일이라는 남자와 간통한 일이 발각됐는데, 신사량이 신천일의 아내를 살해한 것이다. 원래 신사량의 아들은 장애를 갖고 있었는데, 신천일의 아내가 신사량의 며느리를 꾀어 자기 남편과 간통케 했다는 게 이유였다.

이 사건을 두고 조정에서 논란이 일었다. 형조에선 신사량이 살인을 저질렀으니 법에 따라 사형에 처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일부 대신들은 법리가 아닌 정리(情理)로 보면 이해 못 할 일도 아니라며 감형을 호소했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조정에선 임금이 결정해 달라고 청했다. 정조는 신사량을 사형 대신 유배형에 처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법이란 천하에 공평한 것으로 임금도 형량을 올리고 내릴 수 없다. 그러나 신천일의 처 하나의 목숨을 똑같이 보상해 주는 것은 풍속을 무너뜨리게 하는 것이다. 교화는 중한 것이고 법률은 가벼운 것이다.”

신사량의 행위는 요새 말로 하면 법 절차를 무시한 사적 보복에 해당한다. 조선은 법치 국가여서 지금처럼 사적 보복은 범죄로 규정됐다. 하지만 보복에 대한 감정은 법 이전에 존재하는, 지극히 원초적이고 강렬한 본능이다. 따라서 사적 보복은 어쩌면 ‘정의의 실현’이라는 법이념에 가장 잘 부합하는 도덕률일지 모른다. 신사량 사건에 대한 정조의 결정은 그런 고민에서 비롯된 것으로 짐작된다.

사적 보복이 공적인 영역에서 일어났을 경우 그 행위는 대개 의로운 행위로 수긍된다. 김구 암살범 안두희를 ‘정의봉’으로 때려 숨지게 한 박기서의 예가 그렇다. 또 법이 악을 제대로 응징하지 못해 불신이 팽배한 경우 사적 보복은 지탄보다 공감을 얻게 된다. 아동 성범죄자 조두순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광범한 분노와 응징 시도가 그렇다.

그런데 요즘 조두순에게 행해지는 일부 사적 보복 행위들은 그런 공감이나 수긍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어 보인다. 조두순 출소 이후 그의 집 앞에는 사람들이 몰려들어 욕하면서 물리적 가해까지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극성 유튜버들이 돈벌이 목적으로 밤늦게까지 경쟁적으로 방송함으로써 주민들에게까지 고통을 준다고 하니 이 무슨 못된 짓인가 싶다. 정의가 아닌 제 잇속을 위한 사적 보복은 법리로 봐서도 정리로 봐서도 모두 용서 못 할 범죄일 뿐이다. 임광명 논설위원 kmyim@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