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신춘문예-희곡] 노을이 너무 예뻐서/박세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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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장인물 남자 (30대 중반) 여자 (20대 중반)

때: 어느 초겨울

장소: 도로 위

무대: 무대 중앙에 두 명이 앉을 수 있는 오토바이가 한 대 서있다. 오토바이 앞쪽에는 자동차 신호등이 하나 서 있다. 나머지 한쪽엔 도로와 인도를 구분할 수 있는 연석이 있고, 인도 위에 등받이가 있는 벤치가 있다.



1.



무대 밝아지면 달리는 오토바이 위에 남녀가 앉아있다.

둘은 한동안 말없이 달린다.

자동차들이 빨리 달리는 소리와 경적 소리가 정신없이 뒤섞인다.

잠시 후 초록불이던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고, 오토바이가 잠시 멈춘다.

뒷자리에 타고 있던 여자 가 헬멧을 열어젖히며 앞자리의 남자에게 말을 건다.



여자 우리 달린 지 얼마나 됐어요?

남자 한 시간?

여자 기름은 얼마나 남았어요?

남자 음, 절반 조금 넘게요.

여자 그럼 얼마나 더 갈 수 있죠?

남자 적어도 두, 세 시간은 더 달릴 수 있어요.

여자 어디까지 갈 거예요?

남자 생각 안 해봤어요.

여자 그럼 얼마나 더 갈 거예요?

남자 그것도 생각 안 해봤어요.

여자 오빠라고 불러도 되죠?

남자 네?

여자 저 보다 나이 많아 보이던데, 그냥 오빠라고 부를게요.

남자 …… 편한 대로 불러요.

여자 오빠는……



여자가 무슨 말을 더 이어가려고 하는 찰나, 신호등이 다시 초록불로 바뀐다.

오토바이는 다시 한참을 달린다.



여자 배 안 고파요?

남자 네?

여자 (더 큰 소리로) 배, 안 고프냐고요!

남자 아…… 조금요.

여자 (더 큰 소리로) 뭐라고요?

남자 (큰 소리로) 배, 고프다고요.

여자 (웃으며) 그럼 밥 먹으러 가요. 우리 얼마 남았죠?

남자 9만 원 정도요.

여자 우와. 비싼 거 먹어도 되겠다.

남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여자 오빠는 죽기 전에 딱 한 가지만 먹을 수 있다면 뭘 먹을 것 같아요?

남자 (잠시 고민하다) 감자전이요. 어머니가 해 주신.

여자 그건 지금 못 먹잖아요.

남자 그럼 그쪽은 뭐 먹을 거예요?

여자 전, 한우요.

남자 한우 먹으러 가요.

여자 9만 원으로요?

남자 조금만 먹으면 되죠.



오토바이가 다시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춘다.



여자 에이, 오늘은 배부르게 먹고 싶은데.

남자 그럼 배부르게 먹고 도망갈까요?

여자 네? 어떻게요?

남자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몰래?

여자 요즘 그런 거 안 돼요. 걸리면 경찰서 가요.

남자 안 걸리면 되죠.



여자는 남자의 말이 어이없는 듯 크게 웃는다.

여자의 웃음소리를 들은 남자도 따라 웃는다.



여자 진짜 오랜만에 크게 웃는 것 같아요.

남자 그 말이 그렇게 웃겨요?

여자 너무 어이없잖아요. 한우 먹고 도망갈 생각을 하다니.

남자 먹고 싶다고 하니까.



오토바이가 다시 출발한다.



여자 그냥 달리다가 맛있어 보이는 데로 가요.

남자 그럼 그쪽이 골라요. 난 다 괜찮아요.

여자 딴말하기 없기에요? 뭐가 맛있으려나.

남자 9만 원 잊지 마요.

여자 알겠어요.



여자가 열심히 식당 간판을 눈으로 좇는다.

그러다 한 곳을 발견하고 소리친다.



여자 어! 저거! 저거 먹어요!

남자 어디요?

여자 저기! 소꼬리찜! 나 저거 한 번도 안 먹어봤어요.

남자 소는 소네요. 저기로 가요.



남자가 차선을 바꾸려고 하는데 옆에서 승용차가 끼어들며 경적을 울린다.

남자가 놀라 오토바이가 크게 휘청거린다.



여자 어, 어. 조심!

남자 놀래라.

여자 우리가 잘못한 거예요?

남자 아니에요.

여자 깜짝이야. 죽는 줄 알았네.

남자 그러게요. 죽을 뻔 했네.



남자와 여자 웃는다.

오토바이가 식당 앞에 멈추고 둘은 내린다.



여자 (신나게 헬멧을 벗어 오토바이에 걸치며) 아, 기대 된다. 빨리 가요. 빨리!

남자 알았어요. 먼저 들어가요.

여자 먼저 가서 주문해 놓을게요.



여자, 무대에서 사라진다.

남자는 지갑을 꺼내 현금을 확인하려다 그 안에 신분증이 잘 있는지 확인한다.

그 후,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이려다 담뱃갑 안의 담배 개수를 확인하고 다시 집어넣는다.

사이드미러를 보며 머리를 매만진다.

무대 어두워진다.



2.



무대 밝아지면, 여자와 남자가 식당에서 나오고 있다.



여자 진짜 맛있었다. 오빠는 꼬리찜 먹어 봤었어요?

남자 아뇨. 저도 처음 먹어 봤어요.

여자 오빠 덕분에 맛있는 거 먹어 보네요. 고마워요.

남자 그쪽이 메뉴 골랐잖아요.

여자 오빠랑 같이 오토바이 타고 가다가 그 식당을 발견한 거니까 오빠 덕분이죠. 제가 사는 동네에는 소꼬리찜을 파는 곳이 없거든요. 뭐, 물론 있었어도 못 먹어 봤겠지만.

남자 그게 그렇게 되나.

여자 매운 거 먹으니까 시원하게 아이스커피 먹고 싶다. 우리 커피 마시면 안 돼요?

남자 커피요?

여자 여기 앉아서 먹고 가요. 날씨도 좋고, 밖에서 먹고 싶어요. 아, 너무 늦으려나?

남자 아니에요. 시간 맞춰서 가야 되는 것도 아닌데. 먹고 가면 되죠. 그럼 금방 사올게요. 여기 잠깐만 앉아있어요.

여자 네.



남자, 커피 사러 나가고 여자는 벤치에 앉는다.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 가방에서 휴대전화를 꺼냈다가 다시 집어넣고 손거울을 꺼낸다.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진다.



여자 헬멧을 쓰니까 머리가 다 눌리네. 예쁜 모습이고 싶은데. 헬멧을 안 쓰면 벌금인가? 아니면 뒤에 타고 있는 건 괜찮나. (잠시 생각하다) 하긴, 상관없겠지.



남자가 커피를 들고 들어온다.



여자 왔어요? 커피다, 커피.

남자 근처에 편의점밖에 없어서…….

여자 괜찮아요. 편의점 커피도 맛있어요.

남자 그래도 마지막 커피인데…….

여자 그럼 가다가 진짜 예쁜 카페 있으면 거기 들어가요. 우리 얼마 남았죠?

남자 2만 원 정도?

여자 그 돈이면 카페 갈 수 있겠네요. 거기서 제일 비싼 메뉴 먹어야지. 오빠도 비싼 거 먹어요.

남자 그래요.

여자 이런 여유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어요. 이 시간에 이렇게 밖에 있는 것도 오랜만이고.



여자의 밝은 모습에 남자는 생각이 많아지는 듯 담배 한 개를 입에 문다.

그리고는 담뱃갑 안의 담배 개수를 센다.



남자 (혼잣말로) 두 개…….

여자 뭐라고 했어요?

남자 아, 아뇨. 아무 말도 안 했어요.

여자 담배 펴요?

남자 네.

여자 저도 한 개만 줘요.

남자 담배 펴요?

여자 예전에 잠깐요.



남자는 망설이다 하나를 꺼내 여자에게 준다.



남자 …… 혹시 무슨 일 해요?

여자 왜요?

남자 그냥, 밝아 보여서.

여자 그냥, 일하죠. 이것저것. 고등학교도 졸업 못 하고 계속 일만 했어요. 먹고 살아야 하니까. 그리고 최근엔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만 있었어요.

남자 왜요?

여자 일이 좀 있었어요. 오빠는 무슨 일 해요?

남자 전…… 저도 그냥 일해요.

여자 나랑 똑같네.



여자, 웃는다.

남자, 웃는 여자를 바라본다.



여자 고양이를 한 마리 키웠어요.

남자 …….

여자 꽤 오래 키웠어요. 학교 그만두고 일 시작하면서 혼자 살게 됐는데, 혼자 사는 사람한테는 강아지보다 고양이가 낫다고 하더라고요. 외로움을 덜 탄다고.

남자 그렇구나.

여자 근데, 키워보니 아니에요. 고양이도 똑같이 외로움을 타요. 하루 종일 일하고 집에 들어가면 현관에서 기다리고 있어요. 내가 들어가자마자 막 나한테 다가와서 다리에 얼굴을 비벼대요. 마치 ‘왜 이제 왔어. 나 하루 종일 심심했어.’ 하는 것처럼.

남자 귀엽네요.

여자 귀엽죠. 근데 그게 너무 안 된 거예요. 햇빛도 잘 안 들어오는 좁은 방에 하루 종일 혼자서. 잠자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래서 월급을 쪼개서 캣타워도 사고, 혼자서 놀 수 있는 장난감도 샀어요. 근데 나는 고양이가 그걸 쓰는지 안 쓰는지 몰라요. 맨날 아침 일찍 나가서 저녁 늦게 들어오니까.

남자 그럼 한 마리 더 데리고 오지 그랬어요. 두 마리면 외로움을 덜 타지 않나요?

여자 변명 같지만, 고양이들은 예민해서 새로운 고양이가 오면 합사라는 걸 해야 된대요. 뭐, 공간을 따로 분리해서 서로 적응시켜주는 기간이라고 해야 하나? 근데 제 방은 원룸이라 분리할 공간이 없었어요. 그럴 시간도 없었고요.

남자 아…….

여자 그런데 몇 년을 그렇게 같이 살다 보니 익숙해지더라고요. 오히려 하루 종일 잠만 자는 고양이가 부러웠어요. 얘는 평생을 아무 걱정 없이 평화롭게 살겠구나 싶어서.

남자 그러게요. 평생 잠만 자도 먹을 것 걱정, 잠잘 곳 걱정 안 해도 되고, 부러운 삶이네요.

여자 그런데 얼마 전에 고양이가 갑자기 하늘나라로 갔어요.

남자 네? 갑자기 왜요?

여자 모르겠어요. 아마 꽤 오래전부터 아프기 시작했는데 제가 몰랐던 것 같아요. 일 때문에 피곤하다는 핑계로 집에 오면 자기 바빴거든요. 고양이의 상태를 살필 정신이 없었던 거죠. 여느 날처럼 일을 마치고 집에 왔는데, 현관 앞에 고양이가 없었어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밥을 주려고 그릇을 보니까 밥이 그대로인 거예요.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고양이를 찾았는데 구석에…….

남자 저런.

여자 일도 안 나가고 몇 날 며칠을 울었어요. 죽고 나서 울면 무슨 소용이겠냐 마는, 너무 미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 아이의 세상엔 나밖에 없었는데, 마지막까지 무심한 주인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사이



여자 근데, 그 모습이 마치 내 모습 같았어요. 아무도 모르게 쓸쓸하게 죽어간 내 고양이처럼, 나도 아무도 모르게 쓸쓸하게 죽어가고 있는 건 아닐까. 나도 어느 날 갑자기 죽어버렸는데 아무도 발견하지 못하면 어떡하지.

남자 저기 미안한데, 너무 감정이입한 거 아니에요?

여자 그런가요?

남자 미안한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가고 그 고양이도 안됐지만, 너무 감성적으로 생각하는 거 같아요.

여자 그럴 수도 있죠. 이제 출발할까요?

남자 내가 실수했나요? 미안해요.

여자 아니에요. 제가 오늘 처음 만난 사람한테 너무 주접이었어요. 해지기 전에 출발해요.

남자 그래요.



남자와 여자, 오토바이에 올라탄다.

여자는 헬멧을 쓰려다 쓰지 않는다.



남자 헬멧 안 써요?

여자 안 쓸래요.

남자 위험할 텐데.

여자 괜찮아요.

남자 ……그럼 바구니에 넣을게요. 줘요.

여자 고마워요.

남자 출발할게요.



오토바이는 다시 달린다.

여자의 머리카락이 바람에 흩날린다.

둘은 한동안 말이 없다.

오토바이는 점점 시 외곽으로 달린다.



남자 이제 외곽으로 나왔네요. 안 추워요?

여자 안 추워요.

남자 얼마나 더 갈까요?

여자 얼마나 더 갈 수 있어요?

남자 마음은 아직 그대로죠?

여자 네.

남자 그럼 그쪽이 원하는 만큼 가요.

여자 ……일단 더 달려요. 오토바이 위에서 바람 맞는 거 생각보다 기분 좋네요.

남자 이제 어디가 나올지 저도 몰라요.

여자 괜찮아요! (큰 소리로) 아, 좋다!



여자, 오토바이를 잡고 있던 손을 놓고 두 팔을 크게 벌린다.



남자 어! 위험해요.

여자 괜찮아요.

남자 손잡이 잡아요!

여자 아, 좋다!

남자 (오토바이 속도를 줄이며) 손잡이 안 잡으면 나 멈출 거예요?

여자 치, 알았어요.



여자, 아쉬워하며 손잡이를 다시 잡는다.



여자 잡았어요. 손 안 놓을 테니까 빨리 달려요.

남자 한 번만 더 놓으면 버리고 갈 거예요.

여자 네, 네.



남자, 속도를 다시 높인다.

여자는 밝은 표정으로 주변 풍경을 구경한다.

남자는 계속 사이드미러로 여자를 힐끗 쳐다본다.



남자 저기요.

여자 네?

남자 근데 왜 죽고 싶어요?

여자 네?

남자 왜 죽고 싶냐고요.

여자 …….

남자 혹시 고양이 때문에 죽고 싶다는 건 아니죠?

여자 그렇다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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