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 신춘문예-평론]백신이 되는 증언과 이야기 유물론 - 김숨론 /강희정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평론 나머지 글은 busan.com에 싣습니다

1. 각오하라

다시 쓰기 위해서는 각오가 필요하다. 양피지나 화선지, 종이가 아니어도, 커서를 움직여 타이핑된 문자들을 삭제하거나 변형하고 대체하는 데도 그렇다. 기록된 것에 일정한 변형을 가하는 것은 기록된 것을 왜곡할 위험이 있고 힘겹게 희미한 언어로 나타날 수 있었던 문자를 어둠의 장막으로 가려버리는 우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만큼 이미 진술된 것을 다시 쓰는 데에는 그 기록이 다루는 역사 그리고 그것이 작성된 시공간과 다시 쓰이는 동시대를 모두 아울러야 하는 부담을 다시 쓰는 존재가 감당하지 않을 수 없다는 의미이다. 설령 다시 쓰여야 할 기록이 고쳐 쓰고자 하는 ‘나’에 의해 작성된 것이라 해도, 단순한 자구 수정이나 오탈자, 비문을 바로 잡는 수준을 넘어서 있는 것이라면 기록된 것을 다시 쓰는 일은 제도적, 미학적, 정치적 차원에서 심대한 파문을 일으킬 수밖에 없다.

한 소설 텍스트를 다시 고쳐 쓰는 일은 그것이 원래 처해 있던 물질적 조건들에 동요를 일으킨다. 만약 그 텍스트가 ‘책’으로 출간된 것이라면, 다시 고쳐 쓰기 이전에 출간된 것과 고쳐 써서 출간된 것 사이를 구분하는 것은 결코 손쉬운 일이 아니다. 저 텍스트를 동일한 것으로 다룰 수 있는지의 문제에서부터 출판시장 등 자본과 결부된 제도적 균열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 이는 확정된 원본에 대한 동의 체계를 흔들게 되며, 작가의 분열이나 작가의 위치를 심문하도록 이끌기까지 한다. 달리 말해, 어떤 시기의 작가가 더 확실한 ‘작가’가 될 수 있는지와 같은 미학적 문제들을 산출한다. 지배적 서술자/발화자가 불투명한 ‘문제’가 될 때, 고쳐 쓰인 텍스트는 수정이나 왜곡의 차원이 아니라 주체의 생산/구성이라는 차원으로 확장된다는 점에서 간단하게 정리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다시 고쳐 쓰기가 연루되어 있는 제도적, 미학적, 정치적 차원은 고정된 텍스트를 뛰어 넘어, 서로 다른 신체적 연결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주목해야 한다. 다시 고쳐 쓰기가 ‘흔적’을 남기는 행위라면, 비록 그것이 ‘나’에 의해 이루어졌다고 해도 텍스트에는 서로 다른 신체가 교접한 ‘자국’을 남기기 마련이다. 하물며 서로 다른 텍스트를 고쳐 쓰는 일이라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연결된 신체는 서로를 알아볼 수도 있고 서로 알아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이들은 하나의 텍스트에 여럿으로 존재하면서 이웃들로 어우러진다. 즉 소설에서의 다시 고쳐 쓰기는 텍스트를 신체와 언어의 누적 그리고 이 양자를 상호적 연속체로 조직하는 일과 다르지 않은 것이기도 하다. ‘#’을 통해, 증언을 통해, 보태지고 이어지는 텍스트, 나의 자리에 초대함과 동시에 너와 연루된다는 이중화된 감각이 한 몸으로 이루어지는 순간, 그곳은 그간 특수하고 고착화된 ‘증언’이 새로운 몸으로 펼쳐지는 장소로 고안된다.

김숨의 소설을 읽는 일에 각오가 필요한 것은 이 때문이다. 김숨이 전하는 ‘각오’는 ‘나’의 확실성과는 상관 없다. 오히려 나의 취약성을 감각하는 것에 가깝다. 다시 고쳐 쓰기가 텍스트의 고정성과 완전무결함에 도전하는 것이듯이, 다시 고쳐 쓰기를 통해서 ‘나’는 수없는 ‘너’를 초대하고 환대하는 역량인 ‘취약성’을 선물로 할당받는다는 것이다. 김숨의 소설이 동시대적일 수 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서로의 불완전함을 밑천으로, 서로의 신체를 의지 삼아, 너의 고통과 아픔을 나의 성대에 허용하고, 너의 목소리를 통해서 나의 생존과 삶의 오솔길을 감각하는 기회는 흔치 않은 것이다. 누군가가 누군가를 ‘대리’하는 것을 넘어서, 증언과 증언의 옆자리에서 증언을 잇고 연결하는 해시태그 신체이자 언어인 김숨 혹은 김숨 소설에 적극적으로 연루되어야 한다.



2. 착근되지 않는 삶이 변용적인 것을 만든다

김숨은 이상문학상과 두 등단작을 개작한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2019)를 출간함으로써, 자기완결적인 자아병(=유전병)이 일으키는 제도적, 미학적, 정치적 질환의 백신을 제공하는 데 이른다. 근대 이후 삽시간에 활성화된 자기완결적 자아가 무한증식하는 자본주의 체제와 짝패로 묶인 이상, 이러한 자아가 외부세계를 잠식해 쌍생아를 생산하는 근친교배의 고리를 끊어내는 백신으로 주어진 텍스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김숨 이전에, 요산 김정한이 아주 희미하게나마, 윤정모가 절절하게 가시화함으로써, 이들의 텍스트는 (후)식민화에 정박된 한국사회의 환부를 드러내는 진단시약으로 제시된 바 있다. 달리 말해 이들 소설은 일본군 위안부와 미군 위안부라는 두 가지 전쟁범죄에 대한 소설적 증언을 남겨둠으로써, 탈역사―바이러스로부터 면역될 수 있는 길을 마련해둔 것이었다.

그러나 우선 김숨은 더 근본적인 차원에서 이를 도모한다. 김숨의 ‘개작’은 자신의 텍스트를 ‘증언’의 자리에 두는 방식을 통해 이루어진다. 실제로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지만 살리고 싶고, 살려야 한다”는 김숨의 후기는 말 그대로 증언이 이루어지는 현장에서 종종 나타나는 ‘수치심’과 구분되지 않는다. 텍스트에 대한 부끄러움 혹은 수치심을 드러내는 글쓰기는 원래 비평의 자리였다. 그럼에도 김숨은 다시 고쳐 쓰기를 통해 시효가 만료되었다고 간주하는 확정된 텍스트에 대한 법적, 제도적 규정을 넘어 자신의 텍스트를 증언대로 올리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즉 김숨에게 다시 고쳐 쓰기는 증언과 식별되지 않는다. 그러니까, 김숨은 수치를 무릅쓰고, 아니 수치를 반복하면서, 다시 고쳐 쓰기를 수행한다. 요컨대 다시 고쳐 쓰는 과정이 증언의 불안정성을 강조하는 게 아니라, 증언과 연루된다는 것을 강조하게 된다는 것이다.

증언이 어떤 시효만료가 선고된 것을 되살리는 호흡장치라는 것을 염두에 두면, 텍스트에 대한 부끄러움 혹은 수치는 텍스트에 기록된 것만을 살리는 데 머물지 않는다. 외려 다시 고쳐 쓰기로서 증언은 텍스트에 기록되지 않은 ‘말’을 텍스트로 불러온다는 점에서, 증언으로 ‘규정’되지 않은 말들을 텍스트 사이에 잠복시킨다. 그런 점에서 차라리 김숨의 텍스트에 등장하는 증언은 텍스트로 ‘기술’된 것이 아니라, 하나의 증언에 잠복해 있는 침묵하는 ‘증언들’을 살리는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김숨이 수치를 거듭하면서 채택한 다시 고쳐 쓰기의 서사 전략은 ‘창작’이라는 문학제도의 규범이나 규칙보다는 지배적 역사 인식 내부에 주어진 적이 없는 일본군 성노예 여성들의 목소리가 펼쳐지거나 잠재할 수 있도록 한 원리이다. 소설적 ‘허구’가 역사로 ‘활동’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김숨의 서사 전략에 있는 셈이다. 따라서 <나는 나무를 만질 수 있을까>는 김숨 자신을 역사화하고 동시에 소설에 기입되지 않았던 목소리를 들이도록 만드는 방식으로 이야기된 것이다. 달리 말해, 소설에 대한 증인으로서 김숨 자신과 텍스트에 대한 증언으로서 다시 고쳐 쓰기가 이루어진 것이다.

다시 고쳐 쓰기는 원본에 수정 혹은 변형을 가함으로써 제2의 텍스트를 만들어 내고, 이때 새롭게 생성된 텍스트와 원본 사이에는 반드시 시차가 발생하게 되므로 원본은 이미 그 자체로 ‘역사’이다. 문제는 이러한 개작 과정은 원본을 기원으로 가정할 수 없다는 사실일 터이다. 편의상 앞서 출판된 것이 있다고 해도, 최종적인 텍스트를 기원으로 삼아야 하는 경우도 없지 않다. 이러한 사정은 기원의 자리를 불투명하게 만든다. 오히려 주목해야 하는 것은 동일하다고 간주되는 텍스트 사이의 ‘시차’가 더욱 중요하다. 시간적 낙차 속에서 이루어진 다시 고쳐 쓰기는 기원의 자리를 불식시켜, 계기적 시간이라는 인식론에 함몰되는 대신 역사를 동시대적인 것으로 전환하는 전략으로 활용된다. 달리 말해, 텍스트로 먼저 출간된 소설에서 인물의 정체성이 할당되었다가 다시 고쳐 쓰게 되면서 그 정체성을 지웠다면, 역사에 대한 감각을 다르게 전환할 것을 요청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가령, 2015년에 발표한 ‘뿌리 이야기’에 등장하는 ‘나’의 고모할머니인 “남귀덕”이 “종군위안부”였다는 사실이 2019년의 개작에서는 나타나지 않고, 또 ‘나’의 애인이 2015년에는 “입양아”로 제시되지만, 2019년에는 이러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는다. 다시 고쳐 쓰면서, 인물을 상징하는 명명법을 지우는 대신, 재일조선인 여행가이드 “사마코”를 내세움으로써 역사의 폭력으로부터 강제되는 ‘피해자 정체성’의 구조를 비켜나간다. 왜냐하면 북해도 료칸에서 목숨을 끊는 사마코는 역사로부터 이루어진 폭력의 구조가 정체성을 통해 반복 강화된다는 사실을 드러내고, 그 모든 폭력이 명명법의 ‘표지’를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날카롭게 들여다보았기 때문이다. 개작의 과정에서 피해자들의 이름을 지운 건 은폐가 아니라, 폭력을 드러내기 위함인 것이다.

김숨은 ‘뿌리 이야기’(2015)를 고쳐 쓰면서 귀덕이 정부에 공식적으로 등록되지 않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이들에게 제도적으로 주어진 이름을 호명하지 않는 것에서 더 나아가 이름을 거부하도록 한다. 이들에게 이름은 “알고 싶지 않”은 것일뿐더러 이름을 통해 반복되는 역사적 폭력을 문제적인 것으로 삼는다고 할 수 있다. 대신 김숨은 이들에게 이름 대신 ‘착근 불가능’이라는 속성을 부여한다. 어디에도 뿌리내릴 수 없다는 착근 불가능의 감각은 살아있는 모든 생명이 공유하는 ‘취약성’과 같은 것이며, 동시에 ‘뿌리 이야기’(2015, 2019)에서 뿐만이 아니라 김숨이 등단 이후부터 지금까지 작품 속에서 주요하게 다루고 있는 인물들의 공통된 특성이기도 하다. 착근 불가능이라는 생명 공통의 취약성은 더욱 다양한 인물과 삶의 양식들을 불러 모은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외에도 입양아, 재일교포, 그리고 “살면서 이사라는 걸 한 적이 한 번도 없”는 ‘나’ 역시도 스스로를 단순하고 깊숙이 뿌리내리는 ‘심근성’이 아니라 태생적으로 뿌리 뻗음이 얕은 ‘천근성’이라 지각함으로써 착근 불가능성을, 곧 취약성을 공유하는 주체로 제시된다.

편의적 명명을 거부하고 자발적으로 착근 불가능이라는 취약성을 감싸 안음으로써 공백으로 남은 이름의 자리를 대신해서 채우는 것은 차마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불분명하고도 무수한 목소리들이다. <한 명>(2016)의 ‘그녀’는 316개의 증언하는 목소리들이 포개지고 이어져 만들어진 것이다. 316개의 목소리와 말들은 모이고 이어져 마침내 ‘풍길’이라는 한 사람의 서사를 구성한다. ‘풍길’은 <한 명>이라는 작품 속, 살아남은 ‘또 다른 한 명’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로, 역사 수정주의가 횡행하는 동아시아 신냉전의 구도 위에서 위태롭게 자리잡은 목소리라고 할 수 있다. 즉 김숨에게 역사는 무수하면서도 상이한 기억들의 ‘집합적 쓰기’를 통해 성립되는 것임을 의미한다.



3. 백신(Vaccin) 개발자들 : 증언이 세계를 구한다

<한 명>에서 나타나는 목소리는 각각의 파장 위에 겹쳐지고 덧씌워질지언정 결코 하나의 동일자적 음성으로 합쳐지지는 않는다. 각각의 목소리는 고유의 진동수를 유지한 채 공존하며 흡수되거나 포획되지 않고 평행선을 그리며 뻗어나간다. 이들은 저마다의 경험을 끄집어내 발화하고 증언함으로써 비워진 ‘그녀’의 이름 자리에 스스로를 위치시킨다. 그 결과 ‘그녀’의 이름은 시시각각으로 바뀌며 그의 성대를 타고 흘러나오는 무수한 목소리로 변용된다. 목소리에 따라 이름뿐만 아니라 일시적으로나마 몸의 주인까지 달라진다는 점에서 ‘그녀’는 무규정적인 것이라기보다 ‘변용적인 것’으로서 신체가 된다. 목소리의 주인에 따라,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변용태로서의 주체는 한 자리에 머무르지 않고 매 순간 모습을 바꾸며 경계를 넘나든다. 변용적인 것이 되는 삶은 그동안 당연하게 주어진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의심하게 한다는 점에서 위협감과 공포감을 야기할뿐더러, 스스로를 취약하고 불안정한 존재로 내모는 위험성도 감수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이 소설에서는 변용적인 것이 고립을 벗어날 수 있는 힘으로 감지되도록 만든다.

이 감지조차도 은유적인 것이 아니라 신체적으로 엄습한다. 왜냐하면 그저 의미 없는 바람 소리에 불과하던 공기의 흐름이 하나의 ‘목소리’가 되기 위해 진동하는 성대의 신체적 작용을 반드시 거쳐야만 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목소리 역시 엄밀한 의미에서 신체의 일부인 것이다. 이 소설에서 인용된 각각의 말 위에 새겨진 ‘미주들’은 말의 출처를 밝히는 것뿐만 아니라, 하나의 텍스트를 이루는 316개의 증언들이 각기 다른 목소리이자 신체들이라는 사실을 드러내 보여준다. 몸들은 서로 이웃하고 부대끼면서 서로를 의지하고 지탱하는 지지대가 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순간”에 “잡아 끌어올리는 손”들이 되어준다.



①이렇게 죽는구나 하고 죽음을 받아들이려는 순간에 격양된 소리가 들려왔다.

“잡았다!”

그녀의 머리끄덩이를 잡아 끌어올리는 손들이 있었다.

―<한 명>, 255쪽.

②그녀는 그이를 만나러 가는 것이 금복 언니를 만나러 가는 것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든다. 해금을, 동숙 언니를, 한옥 언니를, 후남 언니를, 기숙 언니를…….

그이를 만나면 무슨 말부터 해야 하나? 보고 싶었다는 말부터 해야 하나? 아니면 나도 만주 갔다 왔다는 말부터…….

―<한 명>, 256쪽.

③그이가 입원해 있는 병원은 우연히도 여자가 정기검진을 다니는 대학병원이었다. 그녀는 그이가 자신과 다른 도시에 살고 있는 줄 알았다. 그이가 입원한 병원 또한 다른 도시에 있는 줄 알았다. 그렇게 가까이에 그이가 살고 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을 못했던 탓에 허탈감마저 들었다.

―<한 명>, 256쪽.



위의 세 가지 인용문에 따르면, 단일적인 존재로 고정되거나 환원되지 않고 공존하는 목소리들은 발화하고 증언하는 행위를 통해 몸의 주인을 바꾸고, 몸이 자리한 위치를 옮기며 상황에 따라 변화하는 다양한 몸을 만드는 것을 보여준다. 첫 번째 인용문은 ‘나’ 혹은 ‘그녀’의 삶과 죽음이 홀로 내동댕이쳐 있는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그녀들의 삶과 죽음에 연루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