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하얀 공포에서 벗어나는 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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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준영 사회부 에디터

2020년의 마지막 날이다. 하루만 지나면 새해가 밝는다. 참으로 기나긴 한 해였다. 올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명명된 이 역병이 일상을 무참히도 망가뜨린 까닭이다. 욕망의 충족을 차단당하며 참을 수밖에 없는 시기는 일각이 여삼추이니까. “세월 참 빠르네, 벌써 일 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라는 말은 자연히 실종돼 버렸다. 누구나 열중해서 하고 싶은 일을 하며 보냈던 시간은 짧게 느껴지기 마련이다. 하나, 올해는 아쉽게도 그런 기분 좋은 몰입을 만날 수 없었다.

세밑에 어떤 의식을 하는 행위에는 동양인 특유의 심리가 기저에 깔려 있다는 해석이 있다. 세상만사를 나선처럼 뱅뱅 도는 순환론으로 바라보는 인식을 말한다. 새해 첫날이 과거를 털고 새로운 반복을 위해 떠나는 출발선인 셈이다. 이에 비해 한 해를 떠나보내는 서양인의 심정은 그리 절절하지 않단다. 시간을 직선으로 여기는 사고방식이 짙기에 새해를 그리 경사로 여길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물론 이런 동서양 차이를 정설로 받아들이기엔 무리가 있다. 어느 문명권이나 천체의 주기적 현상을 기준으로 하여 세시(歲時)를 정하는 역법을 사용하고 있어서다.

역병 창궐로 실종된 시간과 공간
새해도 느끼지 못하는 사태 우려
감각을 다듬고 생동감을 살리면
코로나 종식할 열쇠 찾을 수 있어

어쨌든 한민족이 송구영신(送舊迎新)을 챙기는데 유별나다는 점은 부인하기 어렵다. 그동안 연말이 되면 한 해를 떠나보내는 기념식을 얼마나 거창하게 해왔던가. 송년회, 망년회 하며 표시한 약속이 12월 달력을 가득 메울 지경이었다. 달리 구분하기 어려운 강물 같은 시간이지만, 굳이 헌것과 새것을 구분하고픈 마음의 발로라고 할 수 있다. 나눌 수 없는 시간에 굳이 이처럼 선을 긋는 이유는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새 출발을 하려는 의지로 읽힌다. 반성이 부족하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들 수도 있지만, 포기하지 않으려는 건강성은 그런 걱정을 상쇄하고도 남는다. 어쩌면 한 해를 정리하는 과정이 있었기에 1월 1일 일출이 더 장엄하지 않을까.

하지만 코로나19는 모든 걸 바꿔놓았다. 거리 두기 강화로 크리스마스는 물론 모든 연말 행사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갑자기 감염병 기세가 강해지면서 5인 이상 모임이 금지되고 말았다. 하루 확진자 수가 잇따라 1000명을 넘기자 사실상 거리 두기 3단계에 버금가는 방역 조치들이 잇따라 나왔다. 자연스레 연말 모임 약속을 표시한 책상 달력에는 붉은 X선들이 그어지고, 휴대전화 속 캘린더의 약속 메모들도 일순간에 삭제됐다. 새해맞이도 힘들게 됐다. 정부와 각 지자체는 바이러스 확산을 막기 위해 주요 일출 명소와 관광지 출입을 통제한다.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 해맞이를 할 수 있는 간절곶은 물론 매년 수십만 명이 모이는 해운대해수욕장도 찾기 어렵다. 한국 철도(코레일)는 아예 인파가 몰리지 않게 1월 3일까지 모든 해돋이 상품을 중단해 버렸다. 바다 열차, 서해금빛열차, 동해 산타 열차 등 관광열차도 운행하지 않는다.

이러니 새해로 규정할 경계선을 정하는 제의마저 사라졌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시간의 흐름마저 너무나 더뎌서 물이 고여 버린 호수를 연상케 한다. 과거와 현재가 뒤섞인 형상이다. 이와 같은 혼돈의 상황에서 올해와 새해의 색깔마저 판별하기 어렵다. ‘하얀 쥐의 해’인 2020년 경자년(庚子年)에서 ‘흰 소의 해’인 2021년 신축년(辛丑年)으로 넘어가기 때문이다. 다른 건 다 사라지고 ‘흰색’만 남아 육방(六方)이 온통 백색인 방 안에 갇힌 듯한 기분마저 든다. 빛깔은 달라도 소설가 임철우의 작품 ‘붉은 방’의 주인공이 느꼈을 당혹감을 절감한다.

코로나19는 이처럼 시간과 공간을 앗아가 버렸다. 인간은 차이를 통해 사물을 인식하고, 행동을 결정하는 법이다. 이러니 감성과 지성의 마비가 우려된다. 상호작용을 통해 이뤄지는 관계마저 파괴될 수 있다. 이 난관을 헤쳐나가는 방법은 두 가지로 꼽힌다. 하나는 촉각을 더 민감해지게 갈고닦는 것이다. 하양은 자그마치 67가지로 분류된다고 한다. 에스키모인들은 그 가운데 마흔 가지가 넘는 흰색 이름을 가지고 있다. 우리도 그들처럼 순백색의 세계에서 차이를 감지하는 분별력을 키워야 하는 것이다.

이 어려운 상황에 굴하지 않는 의지도 중요하다. 이중섭 화가의 작품 ‘흰 소’를 머릿속에 떠올려 보자. 그 거친 느낌은 금방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 같은 생동감을 안겨 준다. 현대 추상미술의 선구자 바실리 칸딘스키는 이렇게 말했다. “흰색은 침묵이다. 그러나 죽음이 아닌, 가능성으로 가득 찬 침묵이다.” 흰 소가 위대한 창조를 주문하는 것처럼 들린다. 신세계로 들어갈 비밀의 열쇠도 얼핏 보인다. 백신(vaccine)의 어원이 소를 뜻하는 라틴어 ‘vacca’가 아닌가. 코로나19 종식이라는 새해 희망을 놓치지 말자. 운을 대하는 태도가 운보다 더 중요하다. gap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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