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미국 의사당에 나부낀 태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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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지지 시위대가 워싱턴DC 연방의회 의사당에 난입한 지난 6일, 현장에서 특이한 장면이 포착됐다. 미국 국기인 성조기와 백인 우월주의를 상징하는 남부군 깃발이 물결을 이룬 속에 태극기가 등장한 것이다. 이날 시위 군중 속에 태극기가 나부끼는 장면은 여러 매체의 카메라에 찍혀 전 세계로 퍼져 나갔다.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태극기 집회’에 성조기가 늘 등장했는데, 이번에는 미국에서 미국인들이 자기들 문제로 시위하는 자리에 태극기가 나타난 것이다. 어찌 된 일일까.

“트럼프가 아니면 전쟁”을 외치며 “총 쏘는 법을 모르면 지금 배우라”는 섬뜩한 구호도 서슴지 않는 극성 트럼프 지지자들은 나름의 소명의식을 갖고 있다. “공산주의자들이 나라를 망치게 놔둘 수 없다”거나 “워싱턴DC를 불태워서라도 나라를 되찾아야 한다”는 식이다. 이런 행태를 두고 나오는 분석 중 하나가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다. 지난 대선 때 백인 복음주의 기독교 유권자 10명 중 8명꼴로 트럼프 대통령을 지지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트럼프 대통령을 ‘악마와 싸우는 전사’로 여긴다.

극우 성향 집단 연계된 보수 기독교
트럼프를 악과 싸우는 전사로 여겨
폭력으로 민주주의 상징까지 훼손

한국 개신교 현 상황 미국과 유사해
코로나 사태 등 대중 인식과 멀어져
선거 앞두고 정치 세력화 영향 우려



복음주의라고는 하지만 근본주의 색채를 강하게 띠는 이들이 상당수다. 이들은 여성과 인종에 대한 차별의식이 강하고 환경이나 빈부 문제에도 보수적 성향을 보인다. 이들은 또 기독교 신성의 영토로서 예루살렘의 지위를 회복하길 갈망한다. 예루살렘은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 3대 종교의 성지로서 국제법상 특정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 이스라엘이 수도를 텔아비브로 삼은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그런데 2017년 트럼프는 예루살렘을 이스라엘의 수도로 선언해 버렸다. 근본주의적 기독교인들은 잃어버린 예루살렘을 수복한 것으로 여겼다. 트럼프는 하늘이 내린 영웅이 됐다.

사탄을 숭배하는 어둠의 집단이 세계를 지배하려 한다고 주장하는 큐어논(QAnon)이나 무장투쟁을 선동하는 프라우드보이즈(Proud Boys) 등 극우 단체들과 연결되면서 일부 복음주의 기독교 세력은 정치적으로도 과격해졌다. 특히 큐어논은 어둠의 집단이 지구 장악을 위해 코로나19를 퍼뜨렸으며, 백신도 사람의 DNA를 조작해 노예로 만들기 위한 수단이라고 한다. 코로나19 사망자도 조작됐다고 본다. 이들 세력을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정치적 이익을 위해 적극 활용했고 마침내 의사당을 폭력으로 점거하는 사태까지 초래하게 했다.

우리나라(남한) 개신교는 해방 이후 미 군정 시기를 거치면서 미국 복음주의 기독교의 지대한 영향 아래 정착했다. 그래서 그런지 현재 미국과 우리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 보인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속출하는데도 정부의 방역 지침을 거부하는 여러 교회와 관련 단체가 우선 그렇다. 최근 모 방송의 탐사 프로그램은 선교단체 인터콥의 대표가 코로나19는 어둠의 세력이 세계를 지배하기 위한 수단이며, 백신으로 사람을 노예로 만들려 하고, 그 중심에 한국 정부가 있다고 설교했다고 보도했다. 전 세계의 기독교화를 목표로 하는 인터콥은 BTJ열방센터를 운영하고 있는데, 이때 ‘BTJ’는 ‘예루살렘으로의 회귀’를 뜻하는 ‘Back to Jerusalem’의 약자다. 근래 이 센터 방문자 중 코로나19 확진자가 500명 이상 발생했는데도 상당수는 검사조차 받지 않고 있다.

이런 인식은 인터콥만이 아니다. 일부 개신교 세력이 주도한 태극기 집회에서도 비슷한 주장이 제기됐으며, 다수 교회들도 암묵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더 우려되는 상황은 이들이 정치적 목적을 갖고 세력화하는 때다. 최근 감옥에서 풀려난 전광훈 목사를 두고 정가에서는 올 4월 부산·서울시장 보궐선거와 내년 대선 과정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란 전망이 벌써 나오고 있다. 실제로 전 목사는 이미 815광화문비대위 등 여러 우파 인사들과 함께 13일 ‘광화문 자유대연합 정당’ 출범을 선언하는 한편, 오는 3월 1일 ‘삼일절 국민대회’를 열겠다고 예고한 상태다. 이들은 과거에도 “기독교인이 중심이 돼 대한민국 공산화를 막아야 한다”며 대규모 시위를 가진 바 있다.

우리나라 현 상황이 미국의 것을 꼭 닮은 것이다. 이쯤 되면 미국 의사당에 태극기가 나부낀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그런 일이 있어선 안 되겠지만, 만에 하나 미국 의사당 난동 같은 사건이 우리나라에서 발생한다면 그 결과가 어떨까. 흔히 의사당 난동으로 미국 민주주의가 무너졌다고 개탄하지만 그래도 미국은 혼란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민주주의의 건전함과 저력을 보였다. 보수 성향의 언론들도 폭도로 변한 시위대를 비난하며 트럼프 대통령에게 화살을 돌렸고, 정치인들은 당파를 초월해 대선 결과에 대해 상식에 따른 합리적 결정을 내렸다. 여하튼 미국의 이런 모습은 우리나라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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