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광식의 인문예술 풀꽃향기] 산중 은자들의 겨울나기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전 고신대 총장

중국 시문학의 절정기인 성당(盛唐) 시절에는 불세출의 시인 묵객들이 줄을 이었다. 특히 이백은 시선(詩仙)이며 천재(天才), 두보는 시성(詩聖)이며 지재(地才), 그리고 왕유는 시불(詩佛)이며 인재(人才)라 불렸다. 이들 ‘당시(唐詩) 삼재’ 가운데 소동파가 ‘그의 그림 속에는 시가 있고, 시 속에는 그림이 있다'라고 평한 왕유(王維)는 시작(詩作)뿐만 아니라 남종화의 시조로 추앙될 정도로 그림에도 탁월했다. 왕유에게 시 가운데 으뜸은 산수시였고, 그림 중의 최고는 산수화, 특히 눈 내린 겨울 풍경을 그린 설경화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는 '강산설제도(江山雪霽圖)'를 위시한 많은 설경 명화들을 남기고 있다.

명성에서는 그의 작품에 비할 수 없겠지만 크기에서는 훨씬 능가하는 150호의 거대한 설경화가 우리 집 거실에 걸려 있다. 이 그림은 전통적인 산수화에서 보이는 집과 배가 없음은 물론 인적마저 끊긴 적막한 겨울 산의 정적을 묘사하고 있다. 고적하기 짝이 없는 풍경이지만 음울하지 않고 해맑은 아침 햇살을 가득 머금은 빛나는 설산을 보여 준다. 수묵 산수화가들은 겨울 산을 그릴 때 종종 해 뜰 무렵의 모습을 담고자 하는데, 그것은 아침 운무가 계곡의 깊이와 산의 기세를 보여 주고 햇빛에 반사되는 눈부신 설산이 황홀한 풍경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억겁의 세월 동안 미동도 않은 검은 산석들과 혹한의 추위 속에서도 푸르름을 잃지 않은 노송들이 만드는 풍취는 얼마나 그윽한지 모른다. 이 그림이야말로 내게는 삭막한 도회지에 머물면서도 깊은 산속의 은둔자처럼 살게 하는 일종의 환각 장치라 할 수 있다.

인적 없는 겨울 산의 고즈넉한 정취
적막과 고독, 바람과 구름이 친구
세상에 부러울 것 없는 은자들의 삶
힘든 세상살이 잠시나마 잊게 해

현재의 일상은 그림 속 설산을 간접적으로 체험하지만 적막한 겨울 산에 살고 싶다는 염원은 줄곧 마음에서 떠나지 않는다. 그런데 왕유야말로 이런 산중 한거의 삶을 동경하여 생의 절반은 관리로, 절반은 은자로 사는 반관반은(半官半隱)의 길을 걸었다. 그는 장안 부근 종남산에서의 은거 생활을 위시하여 평생 20년을 은둔기로 보냈다. 어디 왕유만 이 산에 올랐던가? 그의 당대만 하더라도 맹호연이나 이백도 이 산에 머물기를 좋아했고, 그보다 천년 전에는 노자가 이 산의 루관대에서 수행을 했다. 또 한·중 도교사에서 전설적인 진인으로 꼽히는 신라의 김가기(金可記)도 이 산 자오곡에 은거하며 독경과 명상에 주력했다. 그래서 그런지 해발 3767m의 주봉 태을산을 중심으로 천 개의 산봉우리가 장관을 이루는 종남산은 흔히 ‘선도(仙都)’라 불린다. 이런 내력으로 오늘날에도 중국에서는 물론 세계적으로도 많은 은자들이 찾고 있다. 번잡한 세상사를 뒤로하고 산중에 은거하고 싶은 이들이 찾아가는 곳이 어디 이 산뿐이랴? 우람하지만 고적하게 서 있는 세상의 깊은 산들은 자기와 살을 비비고 살아갈 고독한 방문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은자들은 산속에서 대체 어떻게 살아가는가? 이들의 거처는 대개 흙이나 나무 구조 위에 목피나 갈대를 얹은 작은 초옥인데, 그 안에는 침상, 차 솥, 약 절구, 나무 책상, 그리고 낡은 경전 한 권 정도가 있을 뿐이다. 집 가에 대나무 울타리 세우고, 작은 텃밭 만들며, 차나무 몇 그루 심는 게 전부다. 그렇게 갖추면 그런 대로 살 만하겠지만, 이런 겨울철은 여전히 만만치가 않다. 산속 추위가 혹독하여 바람막이도 철저히 해야 하고 땔감도 많이 준비해야 한다. 주로 하루 한 끼 식사이나 다른 계절처럼 채소나 산과일이 없는 긴 겨울을 보내려면 다른 먹거리도 제법 확보해 두어야 한다. 저녁 식사는 차로 하지만 배고픈 경우를 대비해 곶감이나 말린 고구마 조각도 준비한다. 물론 겨울잠이 싫어 쏘다니는 토끼의 발자국을 보고 덫을 놓으면 별식을 마련할 수도 있다. 혹 목이 마르면 눈 한 움큼 입에 넣거나 아니면 고드름 하나 떼어서 빨면 된다. 낮에는 눈 치우고 해질 무렵에는 아궁이에 장작을 넣는 것 외에는 딱히 할 일도 없다.

등잔 기름이 떨어져도 백설과 달빛이 있으니 깜깜하지도 않다. 행여 무서운 적막감과 외로움이 몰려오더라도 '매화서옥도'처럼 굳이 벗이 찾아오지 않아도 된다. 산속의 적막은 어쩌다 날아드는 이름 모를 새들의 날갯짓이나 뼈만 남은 나뭇가지에 앉았다 자기들 무게에 힘들까 봐 땅바닥으로 떨어져 주는 눈송이들이 깨워 줄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날 저물면 먼 동네로 마실 갔던 산노을이 돌아오고, 밤 되면 사람이 그리워 찾아온 북풍이 산을 한 번 휘감고 내려와 방문을 두드릴 것이다. 산 아래의 모든 소음이 단절된 이곳엔 그저 산바람, 맑은 햇살, 흰구름, 눈부신 설산, 그리고 초옥 지붕 위로 떨어지는 푸른 달빛과 조물주가 밤하늘에 보석으로 박아 놓은 별밤만 있을 뿐이다. 세상에 부러울 것이 뭣이 있으며, 이런 정적과 평온의 낙이 세상 어디에 있으랴.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