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895>집에 부랴 돌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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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각 1병.’

흔히, 술자리에서 머릿수와 뚜껑을 딴 술병 숫자가 같으면 저렇게 표현한다. 1인당 한 병, 각각 한 병 마셨다는 얘기다. 한데, 저런 표현은 과연 제대로 쓰인 것일까. 국립국어원에서 펴낸 <표준국어대사전>(표준사전)을 보자.

*각(各): [관형사] 낱낱의.(각 가정./각 개인./각 학교./각 부처./각 지방.)

엇! 이건 아니다. ‘각’이 이런 뜻이라면 ‘각 1병’은 ‘1병마다’라는 말이 되고 만다. ‘사람마다 1병’이 되려면 역시 ‘각각 1병’이라야 했던 것. 표준사전을 보자.

*각각(各各): [부사] 사람이나 물건의 하나하나마다.(네 사람은 각각 자기 의자에 앉았다./사람들은 생각이 각각 달랐지만 다수의 의견에 따르기로 합의했다./차바퀴가 지나다닌 곳이 나란히 평행을 이루며 뻗어 있어서 두 사람은 각각 바퀴 자국 하나씩을 따라 걷게 되었다.<한수산, 유민>)

이러니 ‘서울 부산 대구 각각 1명’을 ‘서울 부산 대구 각 1명’으로 쓰면 안 된다. 중첩된 말을 저렇게 뚝 꺾어 절반만 쓰면 전혀 다른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때 그랬지’와 ‘그때그때 그랬지’에서 보이는 차이가 바로 그런 것. ‘곳’은 한 곳이지만, ‘곳곳’은 여러 곳이다. 그런가 하면, 잘못 꺾으면 아예 사전에 없는 말이 되기도 한다. ‘책을 열심히 봤더니 너덜해졌다’를 보자면, ‘너덜너덜해지다’에서 ‘너덜’을 하나 생략하는 바람에 어디에서도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새로운 말 ‘너덜하다’를 창조하는 지경에 이른 걸 볼 수 있다. ‘부랴부랴’나 ‘훨훨’을 생략한 ‘부랴’나 ‘훨’이라는 우리말이 어디 있던가.

‘무상급식 폐지 반대 학부모들을 ‘종북’으로 모는 홍준표의 전의와 특유의 ‘똘끼’에 비춰 어느 하나 호락하지 않다.’

어느 신문 논설위원의 칼럼인데, 여기서도 중첩된 말을 생략해 쓰는 바람에 이상한 뜻이 되고 말았다. ‘호락(瓠落)하다’는 ‘겉보기에는 커도 소용이 없다’는 뜻. 그래서 ‘어느 하나 만만하지 않다’는 뜻으로 쓴 글이 ‘쓸모 있다’는 뜻으로 바뀌고 만 것이다.

이러니, 말을 생략하는 건 조심스러워야 한다. ‘말 안 해도 알겠지’가 아닌 것. 사실 부처님과 제자들쯤이나 되니 불립문자(不立文字: 불도의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는다는 말)나 염화미소(拈華微笑: 말로 통하지 아니하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일)가 되는 것이지, 보통 사람으로서야 가당키나 한 일인가. 말을 생략하는 것도, 줄이는 것도 꼭 필요한 곳에서 해야 빛이 나는 법.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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