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동래사직단 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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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를 다룬 사극을 보다 보면 임금과 대신들이 국정을 놓고 논쟁을 벌이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이때 대신들은 종종 ‘종묘사직 보존’을 이유로 임금에게 자신들의 뜻을 받아들일 것을 주장한다. 종묘사직이 임금의 결정을 좌우할 만큼 매우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도 그럴 것이 종묘가 역대 왕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라면, 사직은 토지의 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을 위해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모두 왕조의 정체성을 상징했다. 이 때문에 종묘와 사직은 함께 묶여서 불렸다. 보통 도읍을 건설할 때 ‘왼쪽엔 종묘, 오른쪽엔 사직’을 뜻하는 ‘좌묘우사(左廟右社)’의 원칙을 적용하는데, 우리나라와 중국의 역대 왕조들은 대체로 이를 지켰다고 한다.

종묘사직은 이처럼 시설물 자체가 왕조를 표현하는 상징물이기 때문에 중앙집권적 통치술의 차원에서도 매우 중요하게 활용됐다. 절대 왕권과 왕조 체제의 확고한 지배 질서를 일상생활 속에서 피지배층에게 주입하는 역할을 했다. 보통 국초에 왕조의 개창자가 전국에 걸쳐 사직단 설립을 서두르는 중요한 이유이기도 하다. 사직단을 연결 고리로 국왕이 있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과도 수직적인 국가 체제를 다질 수 있었다.

조선 시대에는 이런 사직단이 전국 340여 곳에 세워졌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10여 곳의 사직단만 남았는데, 이 중 한 곳이 부산의 동래사직단이다. 지금의 사직동이라는 지명이 여기서 유래했다. 전국 각지에 남아 있는 ‘사직’이라는 지명 역시 같은 연원을 갖고 있다.

최근 부산 동래구청이 표석으로만 남아 있던 동래사직단을 복원해 다음 달부터 개방할 계획이라고 한다. 2015년부터 시작한 복원 사업에 약 33억 원의 예산이 투입됐는데, 앞으로 매년 9월 이곳에서 역사적 의미를 기리기 위한 제사도 진행하고, 문화관광 해설 프로그램도 시행할 예정이라고 한다. 역사·문화적 볼거리가 그렇게 흔치 않은 부산에 또 하나의 새로운 볼거리가 생겼다니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다만 왕조 시대에 절대 왕권의 지배 이념을 공고히 하기 위한 시설물인 사직단의 숨은 의미도 함께 인식돼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거액을 들여 복원한 역사 시설물이 오늘의 부산에 어떤 역사적 메시지로 다가와야 하는지도 곁들여 느껴 보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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