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라-리] BJ 흉가 체험장으로 전락한 '실로암의 집', 그곳에 무슨 일이?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이재화기자 jhl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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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미스터리 수사대 '날라-Lee'.

<부산일보> 독자가 원하는 건 무엇이든 '날라'주는 '이' 기자입니다.

갈고 닦은 취재 기술로 도심 속 미스터리를 파헤칩니다. 문득 '저건 뭐지?'라는 생각이 든다면 주저 말고 제보해주십시오. 동네 어르신의 '전설 같은 이야기'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작은 제보가 거대한 진실이 될 수도 있습니다.


부산 기장군 정관읍 한 산 중턱.

4층짜리 폐건물이 외로이 방치돼 있습니다.

창문은 산산이 조각나고, 의문의 사진과 서류가 널브러져 음산한 분위기를 풍깁니다.

'실로암의 집'. 과거 형제복지원 재단이 운영했던 마지막 중증 장애인 요양시설입니다.

형제복지원은 1975~1987년 강제로 끌려온 시민들에게 강제노역, 폭행, 살인 등 인권유린을 자행한 곳.

도대체 이곳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요?


철문으로 굳게 닫힌 입구.

200~300m 가파른 경사길을 오르자 실로암의 집이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그런 것처럼, 깨진 창문에 철제 의자가 박혔고 모든 방 문은 열려 있습니다.

거주 장애인으로 추정되는 인물 사진들이 바닥에 널브러졌고, 사무실 화이트보드엔 과거 업무 때 쓰던 글이 여전히 또렷합니다.

형제복지지원재단이 수신인으로도 된 서류도 여럿 눈에 띄었습니다.

컴퓨터실, 대형 급식소, 화장실 등 수십 개 방에는 먼지에 뒤덮인 옛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습니다.


주민들은 실로암의 집에 대해 '모른다'는 답변뿐. 형제복지원과 관련돼 있다는 정도만 들었답니다.

등기부등본상에 적힌 ○○재단도 직접 찾아가 봤지만, 문이 굳게 잠겼습니다.

어렵게 통화가 된 사무실 직원은 "특별한 일 없으면 사무실로 출근하지 않는다. 담당자가 아니어서 뭐라 말할 수 없다"고 했습니다.

취재팀은 다행히 수소문 끝에 실로암의 집에서 마지막까지 근무했다는 A 씨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2017년 2월, 마지막으로 자물쇠를 잠그고 나왔습니다."

A 씨는 약 4년간 실로암의 집에서 근무했습니다.

근무 당시에는 1층만 장애인 거주 시설이었고 2~4층은 형제복지지원재단 일가의 전용공간이었다고.

"많은 기자가 찾으려 했던 형제복지원 관련 자료가 (2~4층에) 산재해 있었죠. 이불이 가득 덮인 2층 방에는 형제복지원 입소자 명단, 강제로 끌고 온 공무원이 적힌 인수인계증 등이 있었습니다. 5~6개 박스가 그 이불 밑에 보관됐고, 폐쇄 때도 아무도 꺼내 가지 않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A 씨에 따르면 이 '흔적'은 최근 사라졌습니다. 누가 어떤 이유로 가져갔는지 모릅니다.

"부산시 담당 공무원, 유수의 언론에 방치해서는 안 된다고 누차 얘기했는데, 결국 사라진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끌려왔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는 자료, 정권과 형제복지원의 유착 및 폭행 등이 여실히 드러날 수 있었을 텐데…. 폐쇄하는 결과만 중요시했던 행정의 결과입니다."


취재 결과, 실로암의 집은 형제복지원 재단이 운영한 마지막 시설이었습니다. 그리고 형제복지원 박인근 전 원장 일가의 재산을 불리는 수단이었습니다.

1987년, 형제복지원 사건이 터지면서 박인근 전 원장은 2년 6개월 복역합니다. 강제감금, 살인 등 중대 혐의는 적용되지 않았습니다.

출소 후 박인근 일가는 1991년 중증장애인요양시설을 설립해 그해 12월 실로암의 집으로 이름을 바꿉니다. 그리고 1999년 7월, 현 정관읍 터로 시설을 옮겨 운영합니다.

이들은 실로암의 집으로 사회복지법인을 유지하며 온천, 레포츠 등 온갖 수익사업을 펼칩니다. 이때, 사업을 확장하며 허가나 장기차입 과정에 공무원이 뒤를 봐줬다는 비리 의혹도 터집니다.

사회복지연대 김경일 사무국장은 "한 차례 장기차입이 반려됐다가, 이후 순탄하게 계속 허가가 났다. 재단의 이체내역이나 박인근 원장의 딸 결혼식 축의금 명단에 공무원이 등장하기도 한다"고 했습니다.


실로암의 집이 껍데기만 그럴싸한 복지시설로 전락하면서, 피해는 고스란히 거주 장애인들에게 돌아갔습니다.

형제복지원 낙인에 지원이 끊기고, 무책임한 경영까지 더해지면서 환경은 더욱 열악해집니다.

2002년에는 재단의 무허가 운영 도중 산사태 사고가 나며 11명이 다치거나 숨지는 안타까운 일도 발생합니다.

2016년에는 형제복지원 재산이 졸속 청산되며, 41명의 실로암의 집 장애인이 거처를 잃고 뿔뿔이 흩어집니다. A 씨에 따르면 검증도 되지 않은 신생 법인으로 모두 옮겨졌다고.

폐쇄 과정에서 형제복지원 사건의 진실을 밝힐 서류도 자취를 감춥니다. 박인근 일가 재산 축적 자료, 형제복지원 신상기록부, 정관계 로비 장부 등이 실로암의 집에 있을 것으로 추정됐으나, 졸속 폐쇄와 시설 방치 속에 사라진 겁니다.


중요 흔적이 사라졌지만, 여전히 '그곳'에는 형제복지원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습니다.

형제복지원 마크가 새겨진 활동복, 운영자료집, 수익사업 회계장부 등. 이는 형제복지원의 불법 탈법 재산을 추적하고, 피해자의 억울함을 조금이나마 달랠 중요한 단서가 될 것입니다.

그럼에도 실로암의 현재 장기간 방치되다 최근엔 유튜버의 '흉가' '폐가' 체험장으로 전락했습니다. 건물 곳곳에 '살려줘' '더 이상 오지마' 등의 문구가 적혔습니다.

마치 이곳에서 극심한 인권유린이 벌어진 것처럼 형제복지원의 역사까지 왜곡되고 있습니다. 중요 자료가 훼손될 우려도 큰 상황입니다.

실제 한 아프리카TV BJ는 최근 '마구잡이로 사람을 잡아다가 무슨 짓을 한 거야'라는 제목으로 자극적인 방송을 하기도 했습니다.

취재팀은 실로암의 집 소유 재단에 관리 여부를 문의했지만, "담당자가 아니어서 드릴 말씀이 없다"는 답변만 받았습니다.

부산시는 "이미 청산된 건물이어서 직접적으로 나설 수 없지만, 소유재단에 관리를 요청하겠다"고 했습니다.


형제복지원 사건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2기) 1호 사건으로 재조사를 앞두고 있습니다.

실로암의 집은 사건의 실마리를 풀 마지막 퍼즐 조각일지도 모릅니다.

"더는 증거 자료가 있을까 희박한 상황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지막 남은 시설인 만큼 추가 수사가 필요합니다."(김경일 사무국장)

"형제복지원의 흑역사를 잘 간직하는 차원에서라도 그곳에 남겨진 흔적을 다시 찾아야 합니다."(부산시의회 박민성 의원)

이승훈·남형욱 기자 lee88@busan.com

촬영·편집=정수원·이재화 PD 배지윤·김서연 대학생인턴



이승훈 기자 lee88@busan.com , 남형욱 기자 thoth@busan.com , 정수원기자 blueskyda2@busan.com , 이재화기자 jhl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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