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쓴맛이 사는 맛"

김은영 논설위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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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강연을 마친 후 한 학생이 물었다. “인생 사는 맛이 쓴맛이라고 하셨는데 쓴맛은 어떤 것일까 궁금합니다.” 강연장에 있던 많은 학생이 웃었지만 여든을 훌쩍 넘긴 ‘그분’은 진지하게 답했다. “중학교 1학년의 순박한 질문에 내가 답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인생이 쓴맛이 아닙니다. 쓴맛도 인생의 사는 맛이라는 겁니다.” 그의 말은 이어진다. “쓴맛일 때는 죽을 지경이었죠. 지나고 보니까 쓴맛 덕분에 생각도 하고, 그 덕에 사람이 조금은 더 넓어지고 깊어지더라는 겁니다.”

그분은 지난 2일 별세한 ‘시대의 어른’ 채현국(1935~2021) 선생이다. 서울대 철학과 졸업 후 방송국 PD로 일했지만, 박정희 정권의 방송 제작·편성 간섭에 불만을 품고 3개월 만에 그만뒀다. 이후 부친이 운영하던 흥국탄광을 물려받아 운영하면서 재산을 크게 모았다. 하지만 1972년 10월 유신 이후 사업체를 정리했다. 정권에 이용당하는 상황을 우려한 결정이었다고 한다. 사업체를 처분하고 남은 재산은 직원들에게 모두 ‘분배’했다. 애써 번 것을 ‘나눠 주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선생의 생각은 달랐다. “내 것이 아닌데 뭘 나눠 줘요? (큰돈을 벌게 만든 이들에게) 돌려준 겁니다.”

1988년 경남 양산의 개운중학교와 효암고등학교를 운영하는 효암학원 이사장으로 취임한 뒤 보여 준 모습도 남달랐다. 워낙 소탈한 모습이어서 처음 보는 교사나 학생들은 ‘청소하는 할배’쯤으로 착각했을 정도다. 그에 비해 두 학교의 도서관은 4만 5000여 권의 장서를 갖출 정도로 애정을 쏟았다. “스스로 공부할 줄 알게 하려고” 고민했던 이사장의 교육철학을 엿볼 수 있다. 선생은 “학교는 좋은 학생만 길러 내는 곳이 아니라 좋은 교사도 길러 낼 수 있는 곳”이라고 믿었다. 또한 “세상에 정답이란 건 없다. 한 가지 문제에는 무수한 ‘해답’이 있을 뿐”이라고 강조했다.

“자유롭게 사는 건달” “할배”로 불리길 주저하지 않았던 선생이다. 그러면서도 “늙으면 지혜로워진다는 건 거짓말입니다. 농경 시대의 꿈같은 소리입니다. 늙으면 뻔뻔해집니다”라고 자신의 세대를 향한 쓴소리도 마다하지 않았다. 점점 어른을 찾기 힘들다는 시대, 선생이 남긴 이 말은 두고두고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꼰대는 성장을 멈춘 사람이고, 어른은 성장을 계속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을 지키다 보면 선생이 평생 신조로 여기던 “쓴맛이 진짜 사는 맛”임을 저절로 알아차릴 수 있지 않을까. 김은영 논설위원 key66@


김은영 논설위원 key66@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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