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고양이야 부탁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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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진 디지털미디어부 뉴콘텐츠팀장

“고양이를 부탁해.”

그땐 몰랐다. 이 한마디에 이렇게 일이 커질 줄은. 동물보호단체 ‘라이프’ 심인섭 대표의 제안에 한 후배가 덜컥 “고양이를 키워보자”고 했다. 장소는 편집국. 집사는 팀원들. 생명을 다루는 일이라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요즘 유튜브에 고양이 콘텐츠가 먹힌다던데...’ ‘사무실에서 키우면 조회수깨나 뽑겠는 걸?’ 따위의 생각을 해서는 더더욱 안 될 일이었다. 사연이 있는 아이들이기 때문이다.

‘편집국 고양이-동물동락’ 프로젝트
고양이 키우며 ‘참여 저널리즘’ 실험
동물한테 받는 위로와 위안 ‘큰 선물’
동물 위하는 사회, 사람도 살기 좋아

‘편집국 고양이’ 기획기사를 통해 이미 아는 독자들도 있겠지만, 편집국에 둥지를 튼 ‘우주’와 ‘부루’는 구조묘다. 지난해 5월 경남 김해의 한 불법번식농장에서 구조됐다. 왼쪽 눈을 다쳐 외눈으로 세상을 보는 우주, 두 눈의 각막이 성치 않아 앞이 흐리게 보이는 부루. 7살과 4살. 다른 구조묘들은 속속 입양을 떠났지만, 건강하지도 않고 나이까지 많은 두 녀석은 해를 넘기도록 찾아오는 반려자가 없었다. 구조 당시 사건을 취재하며 고양이들과 ‘묘연’을 맺은 후배 기자는 녀석들이 자꾸 눈에 밟히는 눈치. 한 달간 회의 끝에 고양이를 회사로 데려오기로 결정했다. ‘편집국 고양이-동물동락’이란 이름을 걸고, 우주와 부루가 편집국 구성원들과 교감하며, 제2의 묘생을 시작하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담아보기로 했다.

구성원들과 회사를 설득하기까지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무사히 프로젝트는 닻을 올렸다. 이참에 고백하자면 다른 차원의 고민이 하나 더 있었다. 부제 ‘동물동락’처럼 말 그대로 이번 프로젝트는 ‘동물과 사람이 함께 행복한 사회를 만들자’는 취지다. 구조묘를 데려다 키우는 일에 너무 거창한 의미 부여 아닌가 싶지만 제작진의 고민은 진지했다. 동물들의 이야기를 제대로 다루려면 동물의 입장을 제대로 이해해야 한다. 말 못하는 동물을 대상으로 어떻게 이해도를 키울 수 있을까. 같은 공간에서 생활하며 교감을 나누는 게 한 방법일 수 있겠단 결론에 이르렀다. 동물 복지, 동물의 권리를 논하기 위해 동물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사실 특별할 것도 없다. 취재 대상을 좀 더 면밀하게 파악하기 위해 기자가 직접 체험을 해보는 건 과거에도 있던 방식이다. 다만 그 대상이 동물이란 점이 다를 뿐이다. 근래 ‘체험 저널리즘’이 유행이니, 우리는 ‘참여 저널리즘’이라 조심스레 이름 붙여 본다.

의미를 부여하고 나니, 일이 점점 커지고 있다. 번식농장 문제를 시작으로 불법을 야기하는 펫숍 유통구조, 동물보호법의 허점 등. 당초 계획을 넘어 전시동물, 실험동물, 사역동물 등 동물권 전반의 이야기를 다룰 예정이다. 혹자는 사람도 먹고 살기 힘든 마당에, 한가하게 동물 얘기냐고 할지도 모르겠다. 항변하자면, 장애인을 배려하는 사회는 장애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살기 좋은 세상이듯, 동물을 위하는 사회는 사람도 살기 좋은 세상임에 분명하다. 동물마저 아끼는 이들이라면, 이웃의 아픔에 공감하지 않을 리 없다.

이미 세상은 시나브로 바뀌고 있다. 2015년 사회부 기자 시절, 고양이 학대 기사를 썼을 때만 해도 주변 반응은 미미했다. ‘사람’이 아닌 ‘동물’ 뉴스라는 인식 탓에 지면에 작게 실렸고, 댓글 반향도 크지 않았다. 5년여가 지난 지금, 동물학대 사건은 현장 기자들이 발 빠르게 취재해 ‘속보’로 대처하는 주요 기삿거리 중 하나다. ‘전통’ 운운하며 영원할 것만 같았던 ‘부산 구포 개시장’도 2019년 여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기자들의 끈질긴 취재와 언론의 꾸준한 보도가 한몫했다.

가까이 편집국만 둘러봐도, 우주와 부루가 가져온 변화는 놀라울 정도다. 케이지에서 가장 가까운 자리인 모 부장님은 뉴콘텐츠팀 집사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절친이 됐다. 간혹 편집국장도 녀석들과 놀아준다는 건 몇몇만 아는 비밀. 냄새가 나지 않을까, 털이 날리진 않을까, 괜히 사무실에서 키우다 동물 애호가들의 구설에 오르지 않을까, 걱정 반 두려움 반 시선으로 바라보던 구성원들도 이젠 케이지 앞을 서성이다 용기를 내어 우주와 부루에게 손을 내어 주기도 한다. 취재 하랴, 기사 쓰랴,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다가도 고양이들을 보며 위안을 받는다는 이들도 있다.

가장 큰 변화는 ‘입양 걱정’을 덜었다는 점이다. 당초 편집국에서 우주와 부루를 ‘임시 보호’하면서 적합한 반려자를 찾아보기로 했지만, 입양자가 나타날지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은 입양 의사를 내비치는 이들이 여럿이라, 경쟁을 붙여야 할 정도다. 두 달 남짓 녀석들과 함께하며 ‘동물동락 편집국’을 체감했기 때문이리라. 이쯤 되면 “고양이를 부탁해”란 말이 무색해진다. 오히려 고마워해야 할 입장이다. 지금처럼, 앞으로도, “고양이야 부탁해!” djrhe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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