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건설사는 배짱, 지자체는 방치… 입주민만 모르고 살았다

김성현 기자 kks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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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그럴싸 ‘홈네트워크’

아파트 세대 안의 현관문·조명·난방 등을 제어하는 ‘지능형 홈네트워크 설비’가 법적 기준에 맞지 않거나 부실하게 시공되고 있다. 정전이나 해킹에 무방비로 노출돼 사고나 사생활 침해 등이 우려된다. 부산일보DB 아파트 세대 안의 현관문·조명·난방 등을 제어하는 ‘지능형 홈네트워크 설비’가 법적 기준에 맞지 않거나 부실하게 시공되고 있다. 정전이나 해킹에 무방비로 노출돼 사고나 사생활 침해 등이 우려된다. 부산일보DB

신축 아파트라면 빼놓을 수 없는 설비가 있다. 바로 거실 벽면에 달린 모니터 화면, 즉 ‘월패드’다. 예전에는 현관문 밖 사람과 얘기를 나누던 용도였던 수화기가 집 안 곳곳을 제어할 수 있는 ‘지능형 홈네트워크 시설(이하 홈네트워크)’로 변신한 것이다. 스마트폰과 연동해 실내·외 가리지 않고 출입문, 엘리베이터, 전등, 난방 등 세대 내 모든 장치를 제어할 수 있는 사물인터넷(IoT)의 핵심 시설로 자리 잡았다.


‘예비 전원장치 등 20가지 필수’

2008년에 관련 법 제정됐지만

전국 대부분 아파트 ‘미시공’

지자체 심의 때는 언급도 안 돼


정부도 일찍이 ‘홈네트워크 시대’를 대비했다. 국토부, 산자부, 과기부 등 세 부처는 2008년 관련법을 제정하고 기준을 마련했다. 10년이 훌쩍 지난 지금, 건설사는 법을 잘 지키고 있을까. 반드시 설치돼야 하는 홈네트워크 설비 대부분은 제대로 시공되지 않는다. 이를 관리 감독해야 하는 지자체는 뒷짐만 지면서 사실상 ‘불법’을 방조하고 있다.


■“세대당 수백만 원 재산 피해”


2018년 준공된 경남 김해시 1500여 세대 규모의 A아파트. 최근 이 아파트 입주자대표회의는 세대마다 설치돼야 할 ‘홈네트워크’ 의무설비가 제대로 시공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이에 입주민들은 ‘재산권이 침해됐다’며 시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 중이다. 입주민은 준공 3년 안에 아파트 전유부분(분양받은 공간) 하자에 대해 소송을 제기할 수 있다.

입주민들이 대표적으로 꼽는 미시공 설비는 ‘예비 전원장치’다. 국토부, 과기부, 산업부 공통 홈네트워크 기술기준에 따르면, 예비 전원장치란 전원 공급이 중단될 경우 비상전원을 공급하는 장치다. 세대 내 대부분 장치를 제어할 수 있으므로 정전 등 유사시에도 작동하도록 반드시 설치돼야 한다. 입주민이 예비 전원장치를 별도로 달기 위해서는 세대 공용 부위의 전력 공사까지 겸해야 해 세대 당 최소 50만~70만 원 비용이 발생할 것이라는 게 통신설계업계의 추정이다. 하지만 일부에서는 비상 발전기의 용량 자체를 늘려야 하기 때문에 추가 공사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관측도 있다.

A아파트 관계자는 “지난해 한 아파트 입주민이 지능형 홈네트워크 ‘예비 전원장치’가 시공 안 돼 명백한 하자라고 문제를 제기했다”면서 “시공사가 해당 장치를 반드시 설치해야 함에도, 이를 시공하지 않아 입주민들이 재산권을 침해당했다”고 소송 이유를 설명했다. 인근 3400세대 아파트와 900세대 아파트 역시 같은 이유로 각 시공사를 상대로 소송을 준비한다.

이들의 소송 움직임은 실제 법정에서 ‘재산권 침해’라는 결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앞서 ‘예비전원장치 미시공은 아파트 하자에 해당한다’는 법원 판단이 나온 적이 있다. 지난해 4월 서울행정법원은 예비 전원장치를 미시공해 국토부에 ‘하자’ 판정을 받았던 한 시공사가 ‘부당하다’며 낸 소송에서 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법령에 있는 지능형 홈네트워크 설비가 갖춰야 할 최소한의 사항을 반영하지 못한 것은 설계상의 하자에 해당한다”고 판시했다. 홈네트워크 기술기준은 구속력이 있는 규정으로, 이를 위반할 경우에는 시공상의 하자로 봐야 한다는 뜻이다.


■지자체 방치 속 전국서 불법 만연


줄소송을 예고한 경남 사례처럼 전국 대부분 아파트 역시 이와 같은 기술기준에 따라 시공된 공동주택은 없다고 업계는 입을 모은다. 부산의 한 통신설계 관계자는 “지난해 서울행정법원 판결 이후 서울 지역 1군 건설사는 20가지 기준 중 예비 전원장치만큼은 시공하는 추세”라면서 “하지만 부산, 경남을 포함해 대부분 지역 건설사 중에는 이조차 지키는 곳이 거의 없다”고 전했다.

건설사들의 불법 미시공 행태를 관리 감독해야 하는 일선 지자체는 사실상 이를 방치한다. 우선 건축 심의를 위한 첫 단계인 광역지자체 차원의 건축심의단계에서 홈네트워크에 대한 언급이 거의 없다. 심의에서는 주로 교통, 건축, 토목, 환경영향평가 등이 다뤄지는 탓에 통신 설비에 관해서는 심의위원도 없다. 당연히 심의 때 언급조차 안 된다.

다음 단계인 구·군청 등 기초지자체 심의에서도 홈네트워크는 외면된다. 홈네트워크는 통신 설비임에도 기초지자체에서 해당 업무는 건축과가 맡는다. 건축허가와 착공 때 홈네트워크 규정을 언급해야 하지만 이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필요할 경우 정보통신과에 기술기준 준수 감독을 요청해야 하는데 규정 자체를 알지 못하니 요청도 이뤄지지 않는다.

일선 공무원들은 중앙부처에서 정확한 기준과 업무 분장을 제시하지 않아 혼선이 빚어진다고 하소연한다. 부산의 한 구청의 건축과장은 “전국 대부분 시공사가 기술기준을 지키지 않는 상황에서 전문성이 부족한 담당자가 시공사에 법 준수를 요구하기가 쉽지 않다”고 말했다. 그는 “최악의 경우 시공사에서 ‘왜 해당 구청만 이를 지키라고 하느냐’며 구상권을 청구하면 부담이 크다”면서 “이를 지키지 않아도 눈에 띄는 불편함이나 민원이 없어 기준 준수에 대한 필요성을 솔직히 못 느낀다”고 털어놨다.

김성현·이상배 기자 kksh@busan.com


김성현 기자 kks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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