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필남의 영화세상] 우리가 기다리던 빌런, 크루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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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

어린 시절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를 재미있게 보았다. 사실 애니메이션의 내용보다 달마시안의 이미지가 강렬하게 떠오른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그러하니 모피회사 사장인 악녀 ‘크루엘라’가 기억날 리 만무하다. 동화들은 언제나 주인공의 서사, 영웅에만 주목해 왔음을 기억한다면 사랑스러운 강아지의 가죽을 탐내다가 결국 벌을 받고 마는 크루엘라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 당연해 보인다.

그런데 또 생각해보면 크루엘라는 단순히 악당으로 치부할 수 없을 것 같다. 그녀는 독특한 옷을 입고 “여자의 재능을 가장 많이 사장시키는 건 전쟁이나 기아, 질병과 재난보다 결혼이야”라고 슬프게 말한 전력이 있지 않던가. 그녀는 잔인한 악녀가 분명하지만, 그녀의 생각은 시대를 앞질렀으며 또 남다른 과거를 가진 여성이라는 사실을 짐작할 수 있다.

‘101 달마시안’ 속 대표적 악녀
디즈니 실사 ‘크루엘라’서 조명
악당 된 이유 설득력 있게 묘사

진정한 자아 찾은 주인공 통해
억눌린 현실 속 카타르시스 제공
팝음악·화려한 드레스도 볼거리


최근 이 악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디즈니 실사영화 ‘크루엘라’가 인기를 끌고 있다. ‘101마리의 달마시안 개’에서 크루엘라가 왜 저런 대사를 하는지 그 전사를 알 수 없었다면, 실사영화에서는 크루엘라가 악녀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충분히 설명한다. 하얀색과 검정색 머리카락을 가지고 태어난 ‘에스텔라’는 엄마의 바람대로 착하고 평범한 소녀로 살고 싶지만, 자신의 특별함을 숨기기에는 역부족이다. 불쑥 튀어나오는 그녀의 본성은 숨길 수 없는 법. 결국 학교를 그만두고 엄마와 함께 런던으로 향한다. 하지만 그녀를 지켜주던 엄마가 예기치 못한 사건으로 죽게 되면서 그녀는 자신의 비범함을 억누르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시간이 흐르고 타인의 지갑을 훔치며 살고 있는 그녀에게 꿈에 그리던 기회가 주어진다. 의상 디자이너를 꿈꾸던 에스텔라가 최고의 디자이너 ‘남작부인’의 보조로 일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남작부인은 명성과는 다르게 남의 디자인을 뺏으면서도 이를 당연시하는 뻔뻔하고 비열한 인물이었다. 에스텔라는 남작부인을 만나면서 점차 그녀 안에 봉인해두었던 ‘크루엘라’를 발견하기 시작한다.

이 영화는 내면을 억압하는 에스텔라를 벗어 던지고 진정한 자신, ‘크루엘라’를 찾는데 집중한다. 이때 에스텔라가 자신의 또 다른 자아 크루엘라를 부정하려 애썼다면, 남작부인은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인물로 악녀라는 정체를 굳이 감추려 들지 않는다. 원래부터 악당과 악당의 존재를 숨기려고 했던 그녀들의 싸움이 본격화되면서 영화는 특별해진다.

이제 우리는 착한 인물에 매료당하지 않는다. 아니, 현실에 순응하며 사람들의 눈치나 살피는 인물에 매력을 느끼지 못한다. 크루엘라는 평범한 사람들은 감히 할 수 없는 행동을 과감히 선보이며, 자신 앞에 펼쳐진 고난을 마치 축제라도 되는 듯 즐긴다. 촘촘히 짜인 조직의 망과 법의 테두리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은 그녀를 통해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더불어 자신의 본 모습을 억눌리고 살고 있던 에스텔라를 통해 평범한 ‘나’의 모습을 확인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두 개의 정체성을 가지고 싶거나 혹은 이미 가지고 있지만, 차마 크루엘라를 부를 용기가 없기 때문에 영화 속 그녀에게 지지를 보내는 것은 아닐까. 그리하여 이 영화는 단순히 동화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우리 현실을 반추하는 영화가 된다.

또한 ‘크루엘라’는 여성 빌런(악당) 영화인 줄 알았더니 출생의 비밀과 모성 신화까지 기존의 내용을 답습하지 않고 전복을 거듭하고 있어 흥미롭다. 물론 쉽게 이해할 수 있고 예상 가능한 서사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루할 틈 없이 이어지는 전개와 비틀즈와 딥퍼플 등의 팝음악, 파격적인 드레스 코드는 관객들의 눈과 귀를 사로잡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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