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로365] 외환위기와 코로나 그리고 지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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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래 신라대 글로벌경제학과 명예교수

“부끄럽고 치욕스러운 날입니다. 정부가 결국 국제통화기금, IMF에 구제금융을 신청하기로 했습니다. 신경제를 내세우면서 세계 부자 대열에 끼었다고 자랑하던 게 엊그제인데, 하루아침에 빚더미 삼류 국가로 전락했습니다.” 1997년 11월 21일 뉴스에 나온 앵커 멘트다. 상상도 못 했던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우리 국민들은 그 위기를 국가적 수치로 받아들였다.

명백히 금융기업들의 탐욕이 원인을 제공했고, 그것을 제대로 감독하지 않았던 정부의 잘못이 컸지만, 국민들은 우리 모두의 위기로 받아들이며 협력했다. 그러기에 세계경제사에 길이 남을 금 모으기도 가능했다. 이런 착한 한국인을 보면서도 IMF는, 얼마 안 되는 외화 부족을 핑계로, 대출금 회수를 위한 황당한 구조조정을 강도 높게 추진하였다.

‘지방금융 대학살’이라 할 만한 IMF
자영업자 집중 타격한 코로나 위기
지역 약한 고리 파고들어 피해 더 커

K-반도체 벨트 입지 수도권행 이어
이건희 기증관·K-바이오 랩허브까지
비수도권 배려 없이 지역 미래 없어


그런 어려움 속에서도 한국은 3년 만에 빌린 돈을 다 갚는 저력을 보였다. 강한 제조업 기반이 배경이 되었지만, 국민의 단결된 힘이 중요한 에너지였음은 다시 말할 필요가 없다. 물론 구조조정의 와중에서 수많은 가장이 오랫동안 다니던 직장을 잃어야 하는 예상치 못한 큰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런데 조용히 돌아보면 특히 지방이 치렀던 대가와 고통이 컸다. 금융 구조조정 과정에서, 제대로 된 설명도 없이, 지방금융기관들이 먼저 퇴출당했다. 이른바 ‘지방금융의 대학살’이었다. 그 결과 지방경제를 지탱하는 상징이었던 ‘1도 1행 체제’가 무너지고 시중은행의 지방 시장 잠식이 본격화되었다.

지난해부터 시작된 세계적인 코로나19 바이러스 팬데믹이 세계를 위기와 혼란으로 몰아넣고 있다. 다행히 한국은 선제적이고 효율적인 대응으로 혼란을 최소화하고 있지만, 위기적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다만 그런 속에서도 국민들의 자발적인 동참과 협조 그리고 강한 제조업을 배경으로 한 수출 증가로 경제에 미치는 충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하고 있다.

그러나 외환위기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팬데믹도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갑작스런 상황으로 우리를 몰아넣고 있다는 점에서 위기 상황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다만 위기와 충격의 내용이 다른 데서 피해의 대상과 양상이 다르게 나타날 뿐이다. 외환위기가 정규직 남성들을 직장에서 내쫓아 자영업과 비정규직으로 몰아갔다면, 코로나 팬데믹은 자영업에 집중 타격을 주면서 여성과 청년들의 일자리를 뺏어 가고 있다.

그런데 한 발짝 물러나 다시 조용히 살펴보면 외환위기 때와 마찬가지로 코로나 위기 와중에서 지역이 약한 고리가 되어 가고 있음을 본다. 코로나 방어와 긴급재난 지원 등으로 중앙 중심의 논의와 의사결정이 일상화되고, 거기에 대통령의 임기까지 끝나 가면서, 지역이 정부 정책의 시야에서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균형발전이라는 말이 정부 당국자와 정치인들의 입에서 나오는 것을 듣지 못했다.

코로나 팬데믹 상황에서 터진 반도체 전쟁에 대비하기 위해 새롭게 조성하는 ‘K-반도체 벨트’ 입지가 수도권으로 결정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최근 며칠 사이에만 두 건의 큰 결정이 다시 지역을 배제하면서 이루어졌다. 국민의 많은 관심을 모았던 ‘이건희 기증관’ 건립 입지가 며칠 전 서울로 결정된 것이 그 하나다. 사실 이건희 기증관만큼 근래 전국 각 지역에서 그렇게 큰 관심을 가지고 정부를 압박한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지역의 의견을 들어 보는 절차도 없이 그냥 서울로 결정하는 모양새다.

또한 코로나 상황에서 그 중요성이 엄청나게 높아진 감염병 진단과 신약개발 등 바이오 창업기업을 종합 지원하는 인프라 구축 프로젝트인 ‘K-바이오 랩허브’ 구축 후보지 선정 사업에서도, 기대를 걸었던 경남 대신, 인천으로 결정되었다. 바이오 관련 대기업들과 큰 병원들이 집적되어 있어 좋은 평가를 받았다는 선정 이유가 또다시 지역을 맥 빠지게 한다. 그런 논리라면 앞으로 모든 것이 수도권에 집중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것을 보는 지역의 젊은이들이 어찌 지역을 떠난다고 탓할 수 있겠는가. 수도권으로 진학하려는 우수한 학생들을 어떻게 지역대학에 붙잡아 놓을 수 있겠는가. 실제로 인구의 이동에서 나타나듯이, 코로나로 인한 비대면 사회로의 급속한 이행 속에서, 산업구조 개편이 제대로 이루어지고 그에 따라 기업들이 활발하게 생기고 있는 곳은 수도권밖에 없다.

위기는 언제나 압축을 동반한다. 오랜 시간에 걸쳐 일어날 일을 몇 년 사이에 축약적으로 겪으면서 예상하지 못한 큰 단절을 만들어낸다. 외환위기가 수습되고 나서 지방금융의 큰 축이 무너진 것을 알았듯이, 코로나 이후 뒤늦게 갑작스레 더 쪼그라든 지역을 보게 될 것이 미리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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