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의 타초경사(打草驚蛇)] ‘열하일기’의 그레이트 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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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대 자유전공학부 특임교수

19∼20세기 초엽, 영국과 러시아가 중앙아시아의 주도권을 놓고 벌였던 패권 다툼을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부른다. 결과적으로 그레이트 게임은 제국들의 늪이었다. 19세기 대영제국에서부터 1980년대 소련 역시 결국 발을 잘못 들였다. 그리고 2001년 9·11 사태 후 끼어든 미국은 최근 아프간 전쟁 20년 만에 야반도주하듯 떠났다.

아프가니스탄의 동쪽 국경은 중국의 서쪽 신장 지역에 닿는다. 신장은 서역으로 불렸던 곳으로 이슬람을 신앙하는 중앙아시아인들이 사는 곳이다. 중국 정부가 동화정책을 강요하다가 인권문제로 서방국가들의 입길에 오르내리는 그 땅이다. 이곳과 연접한 아프간이 ‘빈 공간’이 되자 곧 주인이 될 탈레반이 지금 중국을 “환영받는 친구”라며 초대하고 있다.

중앙아시아 놓고 제국들의 패권 다툼
영국·러시아·소련·미국 이어 이제는 중국
18세기 연암의 국제정세 통찰 새겨 볼 만

탈레반과 손을 잡는다면 중국은 중앙아시아 ‘스탄’국가들의 분쟁 한가운데로 빠져들 수 있다. 동시에 “중국 주도로 아프간 안팎이 안정화되고 중앙아시아가 인도양 연안 등 유라시아 초승달 지역으로 연계될 수도 있다.”(정의길) 중국은 동쪽으로 남중국해와 대만 문제로 미국과 신경전을 벌이고 있고 서남쪽으로는 인도와 국경을 두고 긴장을 한껏 높이고 있는 터다. 명실상부한 초강대국으로 발돋움할 기회이면서 동시에 오래된 깊은 늪에 빠져들 위험 사이에 봉착한 셈이다.

이 게임이 어떻게 진행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다. 다만 18세기 조선 지식인 박지원이 <열하일기>에서 청나라의 ‘그레이트 게임’을 분석한 것이 문득 떠오른다. 아, <열하일기>라면 여태 외국 풍물 여행기로 또는 문학 연구의 대상으로 여겨 왔지만, 실은 탁월한 국제정세 보고서다. 애당초 베이징의 자금성에서 건륭제의 칠순 잔치에 참여하고 끝날 행차가 황제의 여름 피서 산장이 있는 열하(熱河)에까지 가게 된 사정 자체가 정치적이었다.

만리장성을 넘어 열하에 이르는 북방 대륙을 주파하면서 박지원은 이것이 청 제국과 조선 간의 외교 의례만이 아님을 깨닫는다. 더구나 황제가 티베트의 달라이라마를 스승으로 초빙하여 깍듯이 섬기는 것을 본 데 이르러 중국을 중심에 놓고 천하의 동서남북을 조망하는, 일종 ‘그레이트 게임’의 사유에 도달한다. 그는 제국의 국제정치학을 네 방향으로 분석하여 기록에 남겼다.

첫째는 내부 한족에 대한 정책이다. 황제들은 한족의 저항이 심한 강남 지역을 여러 차례 순방하며 민심을 다독거렸다. 또 첩자들을 풀어서 반정부 저항 기미를 포착하고 대처하였다. 한편 여진족의 복식과 변발을 강요하며 동화하는 정책을 밀어붙였는데 한족의 반발이 심했다.

둘째는 북방 몽고족에 대한 정책이다. 당시 잠정적 평화는 몽고 부족들이 서로 반목하기 때문이고 제국은 분리통치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는 “황제가 해마다 만리장성 밖 황무지 열하에 거처하는 까닭은, 이름은 피서라 하지만 실상은 황제가 몸소 나가서 북쪽 변방을 방비하기 위함”으로 파악하였다.

셋째는 서방의 티베트 대책이다. “황제는 티베트의 법왕을 맞아 스승으로 삼고 황금으로 전각을 지어 살게 하고 있다. 명목은 스승이지만 실상은 전각 속에 가두어 놓고 하루라도 천하가 안정되기를 꾀하는 것이다. 이것은 황실의 고민이 서쪽 변방의 안보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으로 판단한다.

넷째 동방의 조선에 대한 전략이다. 열하에 도달한 조선 사절에 대한 건륭제의 영접은 놀라울 정도로 후하였다. 박지원은 “그들이 베푼 여러 우대와 공물을 감면하라는 명령은 작은 것을 돌보아 주고 먼 곳을 회유하자는 정략”이라고 이해하였다. 이런 분석을 바탕으로 사방으로 노출된 제국의 어느 한 곳에서 균열이 생긴다면 곧 천하의 대란으로 발전할 것으로 예측하였다. 만일 망국의 위기에 이른다면 청왕조는 고향인 만주로 귀환할 것이고 이때 조선은 큰 위험, 곧 직접 지배에 노출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 대책으로 널리 알려진 ‘북학론’ 즉 청나라의 우월한 기술 문명을 시급히 학습할 것과 동시에 ‘북방론’ 즉 북쪽 국경 지대의 방비 강화를 제안하였다.

18세기 박지원의 통찰, 즉 천하대세가 변동한다면 동쪽의 조선도 그 파도에 휩싸일 것이며 이에 대한 방비를 촉구한 점은 지금도 배울 바가 많다. 오늘날 역시 서방의 아프간에 생긴 ‘빈 공간’에 중국이 끼어들면서 발생할 변동은 인도 접경과 대만에 똬리를 튼 미국과의 갈등을 초래할 것이다. 역시 그 위기의 여파는 동북쪽 접경인 북한에도 미치고 말 것이다.

지금 중국 통치에 반발하여 영국으로 떠나려고 북새통을 이룬 홍콩 사람들 사진을 보고 있다. 아프간의 공백은 홍콩을 통해서 영국으로도 연결되는 셈이다. 우리 주변 국제정세의 파고가 급속히 높아지고 있음을 실감한다. ‘북경 나비의 날갯짓이 뉴욕에 비를 뿌린다’라는 복잡계 이론이 눈앞에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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