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배웅] ‘코호트 격리 1호’ 서린요양원, 아직도 차별과 ‘전쟁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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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 확산 이전 경북 경산 서린요양원 어르신들의 일상은 평화로웠다. 그러나, 지난해 요양원은 전국 1호 코호트 격리시설이 됐고 8명의 어르신이 세상을 떠났다. 서린요양원 제공

38일간의 사투. 소리 없이 찾아온 코로나는 모두를 절망으로 빠뜨렸다. 아흔이 넘은 나이에 춤사위를 즐기던 할아버지, 조기를 좋아하셨던 할머니, 아들을 유독 기다렸던 어르신까지. 요양원 어르신들이 차례로 세상을 떠났다. 코로나와 사투를 벌인 간호사, 요양보호사들에겐 ‘전국 1호 코호트 격리’란 낙인이 찍혔다.

보호사 확진으로 직원·환자 감염
38일간 세상과 단절돼 ‘막막’
간호사 등 직원 고군분투에도
가족 같던 어르신들 세상 떠나
배달 꺼리고 외래 진료도 냉대
격리 해제 후에도 여전한 ‘격리’
어르신 행복한 일상 언제쯤…

■갑작스러운 단절

지난해 2월 15일 요양보호사 김 모(61) 씨는 퇴근한 뒤 친구와 사우나에 갔다. 사우나에서 반나절을 보냈고 열흘 뒤 온몸에 열이 났다. 그 무렵, 경산시 보건소에서 전화가 왔다. “밀접접촉자입니다. 코로나19 검사를 받으셔야 합니다.”

다음날 김 씨는 선별진료소를 찾았다. 그러고 이틀 뒤 28일 코로나 확진자가 됐다. 사우나를 함께했던 친구로부터 코로나에 감염된 것이다.

김 씨는 자신이 일하는 경산 서린요양원에 전화해 연신 “죄송하다”는 말만 쏟아냈다. 수화기 너머 김 씨의 얘기를 듣던 심묘락(59) 간호부장은 아득했다. 할 수 있는 일도, 해줄 말도 없었다. ‘우리한테도 올 것이 왔구나.’ 어디까지 퍼졌을지,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날, 2020년 2월 28일. 서린요양원은 세상과 단절됐다. 전국에서 최초로 코호트 격리가 내려졌다. 안에 있는 사람도 나오지 못하고 밖에 있는 사람도 들어가지 못하는 코호트 격리. 김 씨와 접촉한 사람은 요양원 구조상 특정하기 힘들 정도로 많았다. 코호트 격리 이틀째. 김 씨와 같이 통근버스를 탔던 요양보호사 3명이 코로나 확진 판정을 받았다. 김 씨와 접촉한 어르신 15명을 추정해 한 공간에 모았다. 선뜻 나서는 요양보호사들이 없어 유일한 간호사인 심 부장이 혼자 어르신들을 돌보기로 했다.

“혼자 15명 가까이 되는 어르신들을 돌보는데, 여기서 무너지면 우리 모두 코로나에 걸릴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더라고요.”

제대로 된 마스크도 없었다. 인지능력이 떨어지는 요양원 어르신들에게 방역 수칙 준수를 기대하기란 쉽지 않았다. 심 부장은 덴탈 마스크와 일회용 장갑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이틀, 사흘 어르신들을 먹이고, 씻기고 마스크를 써야 한다고 교육했다. 자고 나면 잊을 걸 알지만 마스크만이 심 부장의 유일한 보루였다. PCR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어르신들 눈에서는 초조함이나 불안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어르신 대부분은 코로나의 존재를 인식할 정도의 인지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

4층에 있던 어르신 수는 줄어갔다. 한 명씩, 한 명씩 병원으로 향했다. 고군분투하던 심 부장에게 ‘이러다 모두 감염되면 어떡하지?’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김 씨는 코로나 때문에 10년 가까이 해오던 요양보호사 일을 그만뒀다. 지금도 그는 동료들의 안부 전화에 “죄송하다”는 말밖에 하지 않는다. 요양원 식구들은 “코로나에 걸린 건 누구의 잘못도 아니에요”라고 이제는 말 할 수 있다. 하지만 당시엔 긴박했던 상황 탓에 누구도 김 씨 잘못이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예고 없는 이별

“전화벨이 울리면 무서웠어요. 특히 새벽에 오는 전화는 항상 안 좋더라고요.”

지난해 3월 27일 새벽에도 반갑지 않은 전화가 울렸다. 당직을 서고 있던 심 부장은 숨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로 보건소에서 94세 어르신 2명의 주민등록번호와 보호자 연락처를 물어왔다. 두 어르신은 같은 방에서 생활하다 함께 코로나에 걸려 김천의료원으로 이송됐다. 주민등록번호와 보호자 연락처를 묻는다는 건 사망했다는 암묵적 부고다. 코로나의 최전선에서 고생하는 처지를 서로 알기에, 언젠가부터 전화 너머로 언제 어떻게 돌아가셨는지를 묻지 않는다.

그날 코로나가 하늘로 데려간 정 모(94) 할아버지는 못 추는 춤이 없는 요양원의 멋쟁이였다. 요양보호사들은 정 어르신과 함께 지르박, 차차차 추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팔굽혀펴기를 하고 요양원 거실을 몇 바퀴씩 돌았다. 코로나가 한창이던 지난해 3월 초, 정 어르신이 양성 판정을 받았다는 소식에 요양원은 모두 충격에 빠졌다. 건강했던 같은 방 이 모(94) 어르신도 코로나를 피할 수는 없었다. 코로나는 요양원 내에서 건강한 사람, 아픈 사람을 가리지 않고 퍼져나갔다.

‘꽃분이 할머니’는 대가족이었다. 80대 중반을 넘긴 아들, 50대 후반의 손자, 30대 증손자까지 4대가 자주 요양원에서 만났다. 큰며느리는 할머니 생신날이면 조기를 손수 구워와 절을 올렸다. 항상 고맙다고, 잘 먹었다고, 작은 몸으로 할머니는 며느리에게도 요양보호사에게도 고개를 숙이셨다.

지난해 3월 코로나에 감염돼 포항의료원에 가셨던 꽃분이 할머니는 107세 나이에도 회복해 요양원으로 돌아오셨다. 석 달만에 돌아온 할머니는 방긋 웃었다. 하지만 컨디션은 예전 같지 않으셨다. 2주 뒤 할머니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자리에 든 뒤 깨어나지 못했다. 꽃분이 할머니가 세상을 떠나던 날 요양원 식구들은 한마음으로 기도했다. “천국에서 할아버지랑 기쁘게 해후하셔요. 시설에서 외롭게 계시던 마음 푸시고요.”

요양원엔 3개 층에 78명의 어르신이 산다. 10명이 넘는 요양보호사들은 매주 담당 어르신을 바꿔가며 돌본다. 늘 곁을 지키다보니 가족보다 어르신을 더 잘 알 수밖에 없다.

오랫동안 동고동락하며 무슨 말을 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정도의 사이가 될 때쯤, 어르신들은 이별을 고한다. 그날따라 밥을 남기시거나 숨소리가 조금만 달라도 요양보호사들은 애가 탄다.



■끝나지 않은 격리

코로나는 새로운 일상이 됐다. 서린요양원은 38일간의 코호트 격리가 끝나고 일상을 되찾았다. 하지만 세상은 완전한 ‘격리 해제’를 허락하지 않았다.

코호트 격리가 끝난 뒤에도 요양원에는 배달이 잘 되지 않았다. 코로나 확진자가 나온 곳이란 이유에서다. 한편으론 이해가 됐지만, ‘눈에 보이는 차별’은 점점 상처가 된다. 지인들이 보내온 마스크, 손소독제 같은 방역 물품도 요양원에 곧바로 닿지 않았다. 택배 기사는 요양원에서 꽤 떨어진 거리에 물건를 두고 갔다. 어르신들 외래 진료를 위해 대구에 있는 병원에 갔을 땐, 주차를 하고 병원 현관에 들어서자 전화가 왔다.

“거기 코로나 확진자 무더기로 나온 데 아니에요? 당장 차 빼세요!”

의지할 곳은 서로뿐이었다. 직원들은 서로를 ‘서린의 용사들’이라고 부르며 위로했다. 힘들 때마다, 코로나로부터 어르신들을 지키지 못하는건 불효라고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코로나를 겪고 나서 요양원 같은 음지에도 사람이 살고 있고 방역이 필요하다는 사실이 알려져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전까지는 아무도 관심을 안 가졌으니까요.”

코호트 격리가 끝난 지 1년하고도 반년. 코로나는 아직도 전국을 뒤덮고 있다. 마스크를 왜 써야 하는지 어제 말했지만 오늘 또 잊어버린 어르신들에게 마스크를 쓰고 손을 씻자고 반복적으로 말하는 일상은 계속되고 있다. 뜻하지 않게 1호가 된 요양원은 여전히 코로나와 전쟁 중이다.

가족 면회가 제한되면서 어르신들의 기억 속에 자식이라는 존재는 시나브로 사라지고 있다. 만남이 끊어져 잊어버린 자식들의 이름은 쉬이 되살아나지 않는다.

“면회도 칸막이 너머로 자유롭게 되고 어르신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는 그런 세상이 다시 왔으면 좋겠습니다. 어르신들이 여생을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보내게 해드리고 싶어요.”

코로나와의 완전한 이별은 요원한 오늘, ‘서린 용사들’은 바라고 또 바란다.

김준용 기자 jundragon@busan.com

※본 기획물은 정부광고 수수료로 조성된 언론진흥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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