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소아시아 기행] 죽음의 푸가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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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자

시인의 육성으로 ‘죽음의 푸가’를 들었다. 이 시를 낭송하는 첼란은 차가운 열기를 유지하려 하나 약간 가는 그의 목소리가 특정 시행에 도달하면 숨이 가빠지면서 읽는 속도가 빨라지고 심지어는 한 구절을 잘못 발음하기까지 한다.

전쟁이 끝나고 유대인의 고난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던 1944년 가을의 몇 달 동안 파울 첼란은 자신이 겪은 개인적 고통에다가 직접 들은 생존자들의 증언을 보태어 아우슈비츠 이후 시의 표준을 형성하는 놀라운 시 한 편을 쓴다. 이 시가 바로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신다’로 시작하는 토데스푸게, 곧 ‘죽음의 푸가’다.

첼란의 시엔 아우슈비츠의 비극 각인
푸가라는 음악적 형식 자체가
탈주를 꿈꾸는 수감자 신세와 닮아

이 시의 화자인 일인칭 복수형 ‘우리’는 어느 수용소의 독일인 소장에게 학대받는 유대인 수감자들이다. 이 시에 들어 있는 다양한 비유들이 독자들을 충격과 경악에 빠뜨리지만, 시의 제목에 들어 있는 ‘푸가’라는 음악 용어 역시 수십 년간 논란의 불씨를 제공했다. 그리고 이 물음은 또 다시 이 시의 탄생 배경이 어떠하며, 이 시를 촉발한 계기는 무엇인가 하는 물음으로 이어졌다.

아닌 게 아니라 이 시가 처음 세상에 발표될 때, 독일어가 아닌 루마니아어 번역본으로 모습을 드러냈고, 제목 속에도 ‘푸가’가 아닌 ‘탱고’라는 단어가 들어 있었다. 1944년 2월경 첼란은 강제노동 수용소에서 탈출 혹은 방면되어 고향 부코비나로 귀향했으나 이곳마저 소비에트의 영토로 흡수되자 더 자유로운 환경을 찾아 수도 부쿠레슈티로 향했다.

고통의 시간 동안 그를 버티게 해 주었던 힘은 바로 시집 한 권을 세상에 내놓겠다는 그의 절실한 목표 하나였다. 드디어 1947년 5월에 부쿠레슈티의 문학지 <당대>에 페트르 솔로몬이 루마니아어로 번역한 첼란의 시 한 편이 실렸는데, 그 제목은 ‘Tangoul Mortii’, 곧 ‘죽음의 탱고’였다. 이 시가 첼란이 출간한 첫 번째 시이고 첼란이라는 이름으로 발표한 첫 시이다

언제인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첼란이 타자기로 친 원고에서 탱고에다가 곱표를 치고 이를 푸가로 대체했을 때, 이 작은 변화가 가져다준 차이는 대단히 컸다. 처음에는 죽음과 푸가를 연결하는 것이 용납 가능한 의미 양태들을 거스른다는 볼멘 반응이 나왔다.

첼란 자신의 의중에 들어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탱고에서 푸가로의 수정은 이 시가 손을 뻗을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넓혀 놓았다. 독일을 음악의 나라로, 독일 민족을 음악의 민족으로 확립하는 데 가장 크게 기여를 한 음악가가 바로 <푸가의 기법>을 쓴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가 아닌가. 그리고 바흐야말로 독일에서 온 최고의 마이스터가 아니던가.

‘죽음의 푸가’에는 ‘죽음은 독일에서 온 마이스터’라는 시행이 네 번 반복되고 있다. 그리고 그는, 곧 죽음의 마이스터는 아리안족처럼 푸른 눈을 가지고 있다. 첼란 개인에게도 푸가가 의미심장한 건, 자신과 같은 수감자의 신세로는 탈주가 절실할 터인데 푸가라는 용어 자체가 도망가고 추적하는, 쫓고 쫓기는 음악 형식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나치의 집단 수용소를 관리하던 친위대 장교들이 독일 고전음악의 수준 높은 애호가나 아마추어 연주자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히틀러는 바그너의 악극 ‘리엔치’를 보면서 자신의 정치적 야망을 키웠고, 베를린 지하 벙커에서 자살한 다음 날인 1945년 5월 1일 독일의 라디오 방송국은 바그너의 ‘지그프리트 장송곡’을 틀어 히틀러의 죽음을 독일 국민들에게 알렸다.

아우슈비츠 수용소장의 숙소에서는 바흐의 푸가 곡들이 자주 들렸다고 한다. 바흐, 헨델, 모차르트, 베토벤, 브람스, 브루크너 등의 고전음악은 독일성을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방식이었다. 반면에 대다수 나치 친위대와 하급 군인들이 즐겨 듣던 음악은 탱고나 폭스-트롯 등의 댄스곡, 재즈, 세미 클래식, 유행가(‘고향은 너의 별’이 당시의 대표적인 히트곡이었다), 영화 히트곡 등이었다. 나치의 죽음의 수용소들에서도 이러한 대중음악들이 밤낮으로 연주되거나 스피커로 울려 퍼졌다.

1943년 11월 폴란드 루블린 지역의 인근 마즈다네크 강제수용소에서 집단 처형이 이루어졌다.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던 1만 7000여 명이 살해된 곳이다. 마즈다네크의 루블린 절멸 수용소에 관한 소련 측 보고서에 의하면, 수십 개의 스피커가 폭스-트롯과 탱고 음악을 아침 내내, 낮 시간 내내, 저녁 내내, 그리고 밤새 요란하게 틀어 댔다고 한다. 스물네 살의 시인은 이 보고서를 읽었고, 이 사실은 그에 의해 이렇게 시로 전이했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그것을 저녁에 마신다/ 우리는 그것을 마신다 점심에 아침에 우리는 그것을 밤에 마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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