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에서] 정치 포르노와 윤석열 그리고 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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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진국 디지털미디어부장

주로 포르노라 불리는 포르노그래피는 사실적인 성행위 묘사가 대부분인 문학·영화·사진·회화를 가리킨다. 말초적 관심을 끌기 위해 관음증에 호소하며, 선정적이고 가학적이다. 당연한 결과겠지만 포르노는 인간의 지위를 동물 수준으로 떨어뜨린다. 특히 여성을 남성 욕망의 종속물로 ‘대상화’하는 부작용을 낳는다.

관음증적 포르노가 정의 자유 평등 같은 미덕을 추구해야하는 정치 영역에 등장한 것은 오래된 일이지만 이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최근 일이다. UCLA대학 근대 유럽사학자 린 헌트 교수는 <프랑스 혁명의 가족 로망스>라는 저서를 통해 ‘정치 포르노’의 위력과 배후에 깔린 남성 중심적 폭력성이 혁명 과정에서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보여준다.

정치 포르노, 권위 무너뜨리는 무기
효용 높아 주요 정치 국면마다 등장
주로 여성들 희생양 전락 가능성 높아
피해자에 씻을 수 없는 폭력 초래
유력 대선 후보들 단호한 태도 취해야

그의 책에 따르면 프랑스 혁명 과정에서 루이 16세는 반역죄 등 정치적 범죄만 추궁당해 사형됐다. 하지만, 그의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의 혐의 목록에는 국가 안보에 대한 음모죄에 더해 사치와 근친상간 동성애 등 온갖 추문이 적시됐다.

혁명 재판 과정에서 그녀에게 덧씌워진 온갖 추문에 대한 물증은 제시되지 않았다. 사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가 썼던 왕실 예산은 프랑스 전체 예산의 3%정도로 앙투아네트는 그 중 10% 정도만 써 역대 왕비에 비해 검소한 편이었다고 한다. “빵이 없으면 파이를 먹으면 되지”라는 앙투아네트의 비정한 어록도 사실이 아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형식적 재판을 거쳐 단두대에 올랐다. 38세 생일을 2주 앞두고 단두대에서 처형된 그녀의 머리는 군중에게 공개돼 사후에도 능멸을 당했다.

혁명 세력이 앙투아네트를 대상으로 정치 포르노를 퍼뜨린 것은 당시로서는 상당히 효과적인 전략이었다. 헌트 교수는 왕가의 성적 사생활을 음란하게 그리는 것이야말로 왕정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왕실에 대한 지지를 붕괴시키는 유력한 방식이었다고 썼다. 왕가의 부도덕성에 대한 음험한 소문은 앙시앙 레짐(구체제)의 모순으로 촉발된 혁명의 가장 강력한 불쏘시개가 됐다. 특히, 남성중심 사회에서 취약한 위치에 있던 앙투아네트야 말로 정치 포르노의 희생양으로 제격이었던 셈이다.

한국 정치사에서도 정치 포르노가 위력을 발휘한 사례가 많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박근혜 전 대통령은 탄핵 과정에서 온갖 저급한 소문의 대상이 됐다. 청와대 경호실이 구입했던 비아그라, 미용 주사 자국, 영애 시절부터 인연이 있었던 목사는 독신 여성 대통령을 주인공 삼은 정치 포르노의 좋은 소재가 됐다. 국정농단과 세월호 사태 수습 과정에서 보여준 무능에 더해 지도자의 권위를 깨버리는 정치 포르노는 분노한 민심에 화약을 쏟아 넣은 것처럼 인화성을 발휘했다.

대중의 말초적 관심에 호소하는 정치 포르노가 그 해악에도 불구하고 주요 정치적 국면마다 등장하는 이유는 이런 폭발력 때문일 것이다. 최근에 서울 종로통에 새로운 정치 포르노가 등장했다. 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인 윤석열 전 검찰총장 부인이 유흥업소에서 쥴리라는 이름으로 일했다는 주장을 그린 벽화가 그것이다. 이 벽화는 극성 여당 지지자들의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타고 급속히 전파됐고, 여·야 지지자들의 물리적 충돌까지 야기하는 등 뉴스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한 여성에 대한 저급한 폭력에 불과한 이런 정치 포르노가 또 등장한 것은 그 효용성 때문일 것이다. 정치 지도자나 특히 여성을 향한 음습한 이야기들은 위력을 발휘한다. 사람들은 부정적이고 자극적인 정보를 더 주목하고 오래 기억하는 경향이 있어서다. 선거에 나선 후보들이 네거티브 캠페인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치적 양극화도 정치 포르노의 토양이다. 비슷한 정치적 성향을 지닌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싶어 하는 메시지만 선택적으로 수용해 걷잡을 수 없는 확증 편향에 빠진다. 아직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는다거나 아폴로 탐사선의 달 착륙이 조작된 사실이라고 믿는 것도 비슷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사고가 극단화되어서다.

피해자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주고, 국민의 생각을 저급하게 떨어뜨리고, 집단적 확증 편향을 부추켜 사회 양극화를 초래하는 정치 포르노의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다. 적어도 지도자라면 음험한 정치 포르노에 기대 이득을 취하려 해서는 안 된다.

백신을 맞으면 항체가 생기 듯, 국민들은 반복되는 추악한 행태에 대해 정치적 분별력을 가지게 됐다. 저급한 소문을 통해 상대 지지율을 떨어뜨리고 표를 얻으려는 시도로 몇 번 재미를 봤을지 몰라도 또 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치 포르노의 유혹에 빠지는 정치 세력은 심판을 피하지 못할 것이다. gook72@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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