곧 사라질 ‘매축지마을’ 기록한 마지막 비망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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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장차 사라질 운명의 매축지마을에 대한 비망록이다. 잊지 않기 위해 기록하는 것이 비망록이다. 공식적으로는 부산시가 공모를 거쳐 선정한 연구진(18명)이 2019~2020년 13개월에 걸쳐 용역 조사를 수행하고서 발간한 ‘매축지마을 생활문화자료조사’ 보고서다. 용역비는 총 2억 원으로 부산에서 마을 하나를 기록하는 데 이렇게 많은 예산을 들인 사례는 없다. 역사, 생활공간, 경제생활, 교류와 협동, 의례, 건축물 현황, 9명의 구술 등 9개 장에 걸친 430여 쪽의 세세한 내용은, 많은 예산을 들인 것에 과연 값하는지 여부를 제쳐놓는다면 매축지마을에 대한 보기 드문 기록임에 틀림없다.

부산시, 430여 쪽 보고서 발간
역사·생활·경제·건축물 등 담아
마을 전성기는 1960~1970년대
부산 경제 성장·쇠퇴와 함께해

그 기록은 이 마을에 대한 마지막 기록이다. 이 마을을 크게 4곳으로 나눌 때 2곳은 이미 재개발이 완료(2006, 2017년)됐고, 1곳(통합3지구)은 2019년 재개발에 착수해 가옥을 모두 철거했으며, 나머지 1곳(통합2지구)도 재개발을 위한 법적 문제가 다 해소된 상태다. 매축지마을은 소멸될 처지에 놓여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이곳은 일제강점기인 1920~30년대 ‘부산진 매축’으로 만든 땅이다. 갯벌 같은 곳에 1.6~3.8m의 흙을 쌓아 만든 땅임을 시추공을 넣어 확인했다. 그런데 복잡한 ‘부산진 매축’을 놓고 매축 연대를 뭉뚱그린 측면이 있다. 통상 매축지마을 땅은 부산진 매축 2기 공사 때인 1927~1932년에 만들어졌다고 하는데 이 부분을 불분명하게, 혹은 1938년에 조성된 것으로 써놓았다.

보고서 부제는 ‘산업도시 부산을 만든 사람들’이다. 그 이름에는 간단치 않은 고난의 여정이 농축돼 있다. 일제강점기 이곳에는 중일전쟁을 위한 병영 시설로 일제의 마구간과 군인 숙소가 있었다. 광복과 한국전쟁으로 몰려든 귀환 동포와 피란민이 이 병영 시설에 4.5~6평씩 칸을 질러 살았던 것이 매축지마을의 시작이었다. 주민 39명 사망, 140명 부상, 가옥 640채 소실. 1954년 4월의 대화재는 이 마을을 처참하게 초토화시켰다. 하지만 그런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난 것이 매축지마을 사람들이요 부산 사람들이었다.

매축지마을의 전성기는 1960~1970년대였다. 1965년 주민등록 통계 인구가 2만 2000명이었으나 통상 6000호 3만여 명에 달했다고 일컬어진다. 당시 범일동 일대는 부산 경제의 중심지로 조선방직 국제고무 동명목재 등 대규모 산업시설이 있던 곳이다. 인근에 북항 부두와 55보급창도 있었다. “저녁에 퇴근하다 보면 시장과 동네가 사람들로 바글바글했다”고 한다. 학생과 젊은 사람들이 넘쳐나는 활기찬 동네였다. 인근에 하나밖에 없는 성남초등학교는 1개 반에 80명이었는데 한 학년이 무려 25~27개 반에 이르렀으며, 사람들이 너무 많아 운동회도 1·2부로 나눠서 열었다고 한다. “아침 출근시간 대 집 앞에 보면 사람 지나가지를 못한다니깐. 가만있어도 저절로 밀려가.”

그러나 1969년 조선방직이 문을 닫은 이래로 삼화고무 국제고무 동명목재가 떠나가거나 망하면서 매축지마을은 서서히 쇠퇴하기 시작한다. 부산 경제 ‘범일동 시대’와 매축지마을의 번성은 맞물려 있었다. 더 크게 보면 매축지마을은 부산 경제가 성장을 멈추고 쇠퇴하기 시작한 것과 거의 같은 길을 걸었다. 그 역사 속에 항만철도와 문현선 철도가 철거되면서 마을 영역이 확장될 때도 있었고, 1969년 자성고가교가 건설되면서 마을이 더 고립되기도 하고, 1979년 북항 제5부두가 완공되면서 바닷바람 피해가 줄어들기도 했다. 또 유흥가가 밀집하면서 ‘매축파’라는 깡패조직이 설치기도 했고, 55보급창 맞은편에는 양공주 홍등가가 늘어서 1970년대까지 영업을 이어가기도 했다.

매축지마을의 삶은 무엇이었던가. 주민 9명의 구술 내용은 이렇다. “방 앞에 포장 쳐놓고 구멍가게를 했지.“(92세 여) ”여기는 한국 경제 발원지야.”(67세 남) “이웃들이 좋아서 고달프지 않은 인생이었어.”(72세 여) “이 동네에 오니까 희망이 싹트더라고.”(64세 남)

이 보고서는 생각할 거리를 남긴다. 부산에서 많이 생산되는 이런저런 마을 기록과 글들은 이번 처럼 세밀하지 못하다. 앞으로는 비슷한 글의 양산이 아니라 내용이 있는 글이 생산돼야 한다는 거다. 별도로 넉넉한 용역비를 들일 수 있는 공공 시스템을 갖췄으면 하는 바람도 생기는 거다. 예산이 넉넉할 때 좋은 생산물도 나오는 법이다. 이번 용역은 부산이 아닌 다른 곳(울산대·동양대·영남대 연합팀) 연구자들이 맡았다. 전문 역량 면에서 부산이 갖춰야 할 것은 아직도 많다는 것이다.

이번 보고서를 위한 현장 조사 과정은 “재개발이 얘기되는 곳을 대상으로 한 것이어서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 매우 힘들게 진행됐다”고 한다. 마을 역사의 기록과 그 보존이 재개발에 방해될 수 있다는 기우는 팽배하다. 어쨌든 이번 보고서가 발간으로 그치는 게 아니라 재개발과 기억·보존의 충돌을 넘어서는 지혜를 모으는 계기가 되기를 바라는 것이다.

최학림 선임기자 theo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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