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 단상] 그들은 왜 즐거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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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혜규 라이프부 차장

“도쿄 올림픽으로 생활이 더 즐거웠습니까?”

한국갤럽의 최근 여론조사 중 이 질문의 결과에는 눈에 띄는 대목이 있다. ‘더 즐거웠다’는 답변이 여성 18~29세(80%)와 여성 30대(71%)에서 가장 높았다. 전체 평균(53%)은 물론이고 다음 순위인 남성 18~29세(64%)와도 차이가 크다. 20~30대 여성의 압도적인 지지는 전체 평균이 80%대에 달했던 과거 올림픽 때에도 볼 수 없었던 양상이다.

사전 분위기도, 종합 메달 성적도 시원치않았던 이번 올림픽을 20~30대 여성이 특히 즐긴 건 일단은 여성 선수들의 활약 때문일 것이다. 올림픽 전체로 봐도 여성 선수 비중이 48.5%로 역대 처음 남녀 동수에 근접했고, 우리나라도 여자 배구와 여자 양궁 등이 큰 주목을 받았다. 김연경 주장의 마지막 올림픽과 감동의 팀워크, 터무니없는 온라인 폭력에도 흔들리지 않은 안산 선수의 집중력은 그 자체로 드라마였다.

선수 성별보다 중요한 건 미디어와 사회가 여성을 다루는 방식을 무력화하는 짜릿함이다. 남성이 디폴트인 사회에서 여성은 대개 비가시화되거나 대상화된다. 젠더 데이터 공백을 다룬 책 ‘보이지 않는 여자들’이 인용한 보고서에 따르면 세계 신문과 방송 뉴스에서 여자가 보도된 분량은 2010년과 2015년 모두 전체의 24%에 불과했다. 2020년은? 딱 1%가 올랐다. 대상화가 궁금하면 구글에서 ‘길거리’를 검색해보라.

드러나는 여성들조차 성역할 고정관념을 벗어나면 금세 비난의 대상이 된다. ‘보이지 않는 여자들’은 미국 대선 후보 시절 힐러리 클린턴과 지금은 미국 부통령이 된 카멀라 해리스 당시 상원의원의 사례를 든다. 힐러리는 너무 야심만만해서 부적절하고 ‘병적’이라는 공격을 받았고, 해리스는 장관의 말을 끊고 제대로 답변하라고 압박했을 때 동료의원의 제지와 ‘히스테릭하다’는 평가를 얻었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국가대표 선수들이 소리지르고 몸을 부딪치고 무시무시하게 집중하면서, 힘과 승리욕을 숨김 없이 드러내면서 힘껏 겨루고 또 성취하는 모습을 지켜보는 경험은 현실과의 낙차 때문에 더 큰 카타르시스였을 것이다. 강남역 화장실 살인사건과 미투 운동, 텔레그램 N번방 이후의 세계에서, 20~30대 여성들은 마땅히 기대했으나 결코 응답받지 못한 효능감을 상상해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올림픽이 끝나고 다시 미디어를 차지한 현실 정치는 이들에게 즐거움은커녕 좌절만 주고 있는 것 같다. “청년세대는 단 한 번의 기회를 갖기 위해, 동료들, 친구들, 또는 여자 사람 친구와 격렬하게 경쟁해야 하는 상황”, “페미니즘이란 것도 건강해야지 집권을 연장하는 데 악용돼선 안 된다”는 ‘대권주자’의 인식 속에서 여성 청년은 여전히 비가시화되거나 대상화된다.

“페미니스트 운동의 목소리가 폭발적으로 터져나오고 있는 동시에 여성혐오 범죄들이 매일같이 쏟아지고 있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현실 정치가 페미니스트 운동의 기대에 따라가지 못하는 지체현상이 지속될 경우 정치적 불신이 높아지고 젠더 갈등으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더욱 높아질 수밖에 없다.” 국가인권위원회가 최근 젠더정치연구소 여.세.연에 위탁해 내놓은 ‘성평등한 정치 대표성 확보 방안 연구’ 보고서의 결론이다. 이미 늦었다. 현실 정치가 분발해야 할 때다. iw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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