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뉴삼성 다음은 한국의 발렌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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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동진 서울경제팀장

“저는 제 아이들에게 회사 경영권을 물려주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제 더이상 삼성에서는 ‘무노조 경영’이라는 말이 나오지 않도록 할 것입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지난해 5월 대국민 기자회견을 가진 자리에서 ‘뉴삼성’을 선언하면서 남긴 말이다. 이병철-이건희-이재용으로 이어진 경영권 승계와 그로 인해 벌어진 각종 잡음들이 더이상 생겨나지 않도록 하겠다는 의지를 보인 것이다. 또한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이 생전에 “내 눈에 흙이 들어오기 전에는 노조를 용납할 수 없다”는 경영 철학도 시대에 맞지 않는 옷이라는 판단에 과감하게 벗었다.

‘뉴삼성’ 선언…경영 승계·무노조 포기
이건희 작고후 문화재, 의료비 등 기부
이재용 출소후 뉴삼성 새 출발 기대
스웨덴 국민기업 발렌베리 행보 닮아

이재용 부회장의 경영권 승계 포기도 향후 지켜질 것으로 보이지만 무노조 경영 포기 약속은 벌써 가시적 성과를 냈다. 삼성전자 노사가 지난 12일 창사 이래 처음으로 단체협약을 제정한 것이다. 무노조 경영을 선언한 지 1년 3개월 만이고, 창사이래 52년 만이다. 예전 삼성이었다면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난 것이다. 노사 합의안에는 노조 활동 보장과 산업재해 발생시 처리 절차, 인사 제도 개선 등 무려 95개 조항이 포함돼 있었다.

이 부회장의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을 맡았던 서울고법 재판부가 “삼성 내부의 감시 조직이 필요하다”는 주문에 따라 회사 내부에 삼성 준법감시위원회도 만들었고, 지난해 5월 대국민 기자회견을 비롯해 각종 사안에 준법감시위의 의견에 따르고 있다. 지난해 5월 이 부회장의 기자회견이후 삼성은 이젠 더이상 과거의 삼성이 아니다.

당시 이 부회장의 기자회견은 1993년 고 이건희 회장이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행한 ‘신경영 선언’과 비견됐다. 당시 이 회장은 “국제화 시대에 변하지 않으면 영원히 2류나 2.5류가 될 것입니다. 지금처럼 잘해봐야 1.5류입니다. 마누라와 자식 빼고 다 바꿉시다”고 주장했다. 이후 삼성은 반도체·IT 분야에서 비약적 도약을 일궈내며 글로벌 기업으로 우뚝 섰다.

이 부회장의 뉴삼성도 새로운 출발점에 섰다. 이 부회장은 뉴삼성 선언후 얼마 지나지 않은 올 1월 ‘국정농단’ 사건 파기환송심에서 징역 2년6개월 선고를 받고 법정구속 됐다가 7개월여 만인 지난 13일 가석방으로 풀려났다. 이 부회장은 이날 “저에 대한 걱정과 비난, 우려, 기대를 잘 알고 있다. 열심히 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부회장의 말대로 경영승계를 하지 않는다면 스웨덴의 발렌베리 가문처럼 소유와 경영을 분리한 지배구조에 기업의 사회환원을 실행하는 ‘국민기업’으로 갈 가능성도 없지않다.

실제 삼성이 최근 보여주는 모습에서도 그 일단을 읽을 수 있다.

이건희 회장의 작고이후 유족들은 12조 원의 상속세 외에 2만 3000여 점의 문화재·미술품을 국가기관에 기증했고, 의료계에도 1조 원을 기부했다.

최근 이 부회장의 행보도 기업가의 ‘업역’을 넘어선 사례들이 적지않다. 코로나19가 확산되던 지난해 정부 당국도 백신 구하기에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이 부회장은 자신의 해외 네트워크를 통해 백신을 대량 확보하도록 주선했다. 또 2019년 한·일무역갈등으로 인한 일본의 반도체 수출규제에 대해서도 정면 돌파를 통해 일본에 보기좋게 한 방 먹이면서 우리 국민들의 자존심을 세웠다.

발렌베리 가문의 기업집단은 삼성처럼 스웨덴 내 경제적 영향력이 엄청나다. 스웨덴 GDP(국내총생산)의 30%, 주식시장 시가총액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이 가문이 지분을 갖고 있는 세계적 기업들로는 에릭슨, 일렉트로룩스, 사브, 아스트라제네카 등 이름만대면 알만한 기업들이 수두룩하다.

하지만 순이익의 상당수를 발렌베리 재단을 통해 사회에 환원하면서 스웨덴 국민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발렌베리는 경영 세습에 적합한 후계자가 있을 경우에만 후계자를 선정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재단과 그룹 경영자는 급여만을 받기 때문에 세계 1000대 부자나 스웨덴 100대 부자에 포함되지 못한다. 또 반드시 노조 대표를 이사회에 중용하고 있으며 대학과 도서관, 박물관, 과학연구 등 공공사업에 투자를 하고 있다. 세습경영을 고집하지 않고, 노조와 손을 맞잡는 모습 등은 뉴삼성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부회장은 2003년 발렌베리가를 찾은 뒤 18년째 인연을 이어가고 있다. 일련의 뉴삼성은 ‘한국의 발렌베리’로 조금씩 다가서는 모습이다.

djbae@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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