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손’이 노트북 엔터 키를 치자 현관문이 철컥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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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 ‘홈네트’ 해킹 동행 취재

지난 21일 경남 한 아파트에서 홈네트워크 해킹으로 현관문이 열리고(왼쪽) 해커 노트북을 통해 실내 촬영이 가능했다.

“어, 한 번에 현관문이 열리네?”

컴퓨터공학 전공 대학원생 ‘해커’가 일면식도 없는 한 아파트 세대의 현관문을 여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20분이었다.

<부산일보> 취재진은 지난 21일 오후 경남의 한 대단지 아파트를 찾았다. 지능형 홈네트워크(이하 홈네트워크)의 보안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입주자대표회의의 동의를 얻어 한 세대를 방문한 뒤 곧장 현관문 해킹에 들어갔다. 이 아파트 단지는 2018년 준공을 한 아파트로, 출입문, 엘리베이터, 전등 등 세대 내 대부분의 장치를 제어하는 홈네트워크를 갖추고 있었다.

대학생 해커, 20분간 월패드 조작
현관문 열리고 거실 내부 노출돼
조명·난방 시스템도 해킹 가능
집 주인 “믿을 수 없다” 충격 받아
첨단 홈네트워크 보안 취약 입증
홈게이트웨이 등 근본 대책 세워야

해커가 명령어를 입력하고 엔터를 치자 현관문은 ‘띠리릭’ 소리를 냈다. 도어락을 전혀 건드리지 않았지만, 거짓말처럼 열린 것이다. 집주인은 “이렇게 간단히 현관문이 열린다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당황해했다.

가장 충격적인 부분은 월패드에 있는 카메라를 통한 사생활 침해였다. 입주민 간의 화상통화를 위해 설치된 카메라를 외부인이 집주인 몰래 켜서 고스란히 거실을 훔쳐볼 수 있다. 거실 카메라 앞에 서 있는 취재진의 모습이 노트북 화면에 그대로 떴다.

<부산일보> 취재진과 동행한 ‘해커’ 역은 홈네트워크 보안 업체가 섭외한 평범한 컴퓨터 전공 대학원생 2명이다. 이들이 해킹을 준비하는 데에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루 정도. 월패드 안에 있는 프로그램을 추출하고 코드를 분석해 기능을 파악하고 취약점을 분석하는 데 걸린 시간이다. 전국 대부분 아파트가 홈네트워크를 법적 기준대로 시공하지 않아 입주자들의 큰 피해가 예상된다는 <부산일보> 보도(4월 15일 자 1면 등 보도)가 실제로 확인된 것이다.

현관문을 여는 데 성공한 ‘해커’가 노트북에 재차 명령어를 넣자 이번에는 거실 등이 꺼졌다. 한 번 더 반복하니 다시 켜졌다. 여러 차례 반복해도 마찬가지였다. 집주인이 스마트폰으로 제어할 수 있는 권한이 해커의 노트북으로 고스란히 넘어간 것이다. 가스 밸브도 마찬가지였다. 명령어를 입력하자 열려있던 밸브가 자동으로 잠겼다. 이들은 25도이던 난방 희망온도를 순식간에 30도까지 올리기도 했다.

더 황당한 것은 이 아파트 단지가 한국정보통신진흥협회로부터 홈네트워크 정보통신인증 AA 등급을 받은 곳이라는 점이다. 조명, 난방, 침입감지기 등 홈네트워크에 연동되는 설비 갯수로 등급을 매기는데, 이 아파트는 총 17개의 설비가 연동되어 홈네트워크 기능이 우수하다는 판정을 받은 것이다. 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보안 설비는 기준에 들어있지 않다. 오히려 보안 설비가 없어 해커가 집 안의 17개 설비를 모두 통제할 수 있다. 보안등급이 높을수록 해킹 피해가 커지는 모순이 발생한다.

이 같은 아파트 지능형 네트워크의 ‘보안 구멍’은 세대별로 해킹을 막는 최소한의 방화벽 역할을 하는 ‘홈게이트웨이’가 제대로 시공되지 않아서다. 정부는 2008년 관계 법령을 신설하고 이듬해인 2009년 국토부, 과기부, 산자부 등 3개 부처 장관 공동으로 설비설치와 기술기준을 최초로 고시했다. 의무 설비 20가지 중 핵심은 정전 때 홈네트워크를 가동하는 ‘예비 전원장치’와 해킹을 방지하기 위한 ‘홈게이트웨이’다. 그러나 지자체와 시공사의 방관 속에 홈게이트웨이 장치가 제대로 구축되지 않은 곳이 대부분이다.

이번 시연에 참여한 해커들은 “보통 은행이나 회사의 보안 프로그램에는 ‘안티 리버싱’을 적용해 외부인이 해킹을 못 하도록 하거나 속도를 늦추도록 한다”면서 “하지만 실제로 아파트 홈네트워크에는 그런 장치가 전혀 없었다”고 말했다. 또 “IT 전공 대학생 정도만 되면 누구나 쉽게 할 수 있고, 인터넷에서 기본적으로 자료가 많아서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이들은 "월패드 프로그램을 한 번 분석하기만 하면 그곳이 집 밖이거나 심지어 서울에서도 무선으로 대상 아파트 모든 세대의 현관문을 여는 것이 가능하다"고 덧붙였다.

전문가들은 ‘스마트홈’ 시대를 대비해 홈네트워크 보안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한국정보통신기술사회 남우기 회장은 “2년 전에 한 고등학생이 관리 시스템을 해킹해 수도권 아파트의 전기세를 0원으로 만드는 사례가 있었다”면서 “공공기관에선 주기마다 네트워크 취약점을 분석하듯이 아파트에도 보안을 점검해야 하고, 세대 간 네트워크 분리를 포함해 근본적으로 문제를 차단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글·사진=김성현 기자 kks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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