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테라스 파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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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진(1962~)

건물에 가려 건물이 보이지 않는다 입술에 가려 입술이 보이지 않는다 다리에 가려 다리가 보이지 않는다 너를 알아가는 것은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보다 어렵다 나를 건너는 것은 너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나는 너를 존중해서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다 존중은 중의 파편일까 사랑은 중의 거미일까 얇은 손톱 안에 끼인 죽음이 있다 빨간 실 같은 벌레 계단을 내려오니 경찰들이 서 있다 내가 너를 죽였다고 한다 설마 설마 셀마 새벽에 다이빙벨을 무료 시청했다 함께 시청한 살굿빛 브래지어를 검은 옛날 가위로 목 잘랐다 묵, 직, 한, 목, 잘, 라, 못, 잘, 라,

-시집 (2021) 중에서-

실체의 앞면에 가려 뒷면이 보이지 않을 때 주체와 객체는 소통되지 않고 분리된다. 사랑은 보이는 것의 이면을 파악하고 보이지 않는 실체를 인정해 주는 것이다. 그래서 깊은 사랑일수록 잘 보이지 않는다. 보이지 않고 소통되지 않은 사랑일수록 고독이 수반된다. 고독은 자발적 자가격리 수단이며 문학이나 예술의 에스프리를 제공하는 배경이기도 하지만 아무도 이해할 수 없고 도와줄 수 없는 고독이 있다. 절대고독. 누구에게나 있으며 누구도 모르는 것처럼 지내야 하는 절대고독을 시인은 이렇게 이야기한다. 너를 알아가는 것은 없는 다리를 건너는 것보다 어렵다. 상대를 향한 존중은 진행형이지만 사랑은 진행되는 존중의 파편이며 거미이며 죽음이다. 사랑에 가려 고독이 보이지 않는 슬픈 현실을 시인은 오늘도 자르지 못한다. 절대고독은 절대사랑의 이면이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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