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 너무 늦지는 않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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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아 소설가

초등학생인 내 아이는 지금 몽골에 있다. 유목민의 전통 가옥이 보이는 푸른 초원을 신나게 뛰어다닌다. 오합지졸 고양이 군사들을 데리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고 있는 아이는, 몽골에서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나면 얼마간의 경험치를 얻게 될 것이다. 그 경험치가 현실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라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몽골도 가고 인도도 가고, 터키, 멕시코, 마다가스카르, 어디든 가라고 박수쳐 줄 수 있다. 하지만 고작 모바일 게임 속에서 얻은 경험치를 가지고 뭘 하겠는가. “엄마, 나 이제 XP 10만이야!” 아이가 자랑하듯 소리친다. 하아… 깊은 한숨이 절로 나온다.

6주가 넘는 긴 여름방학이 또 이렇게 허무하게 끝나간다. 확진자 증가와 사회적 거리두기 단계 격상, 그리고 ‘집콕’의 굴레 속에서, 여행도 물놀이도 못 간 아이의 얼굴은 밀가루 반죽처럼 새하얗다. 움직이지를 않으니 살은 포동포동 잘도 찐다. 나빠질 시력이 걱정이지만 하루 종일 집에만 있는 아이에게 게임마저 금지하는 건 너무 가혹한 일 같아서(실은 내가 좀 편하자고) 어느 순간 풀어주고 말았다. 하지만 등을 잔뜩 구부린 채로 태블릿 화면에 눈을 고정하고 겨우 손가락 운동만 열심히 하고 있는 아이를 보고 있으면 괜히 미안했다가 불쑥 화가 났다가 어느 순간엔 마냥 슬퍼진다.

초등학생 아이 ‘집콕’ 게임에 빠져
태블릿 화면 군사놀이에 여념 없어
오갈 데 없는 코로나 시대 뻔한 일상

지치도록 놀아대던 여름 물놀이장
술래잡기 공놀이 하던 때가 그리워
오감으로 세상 느끼는 삶 언제 올까



코로나 이전의 여름방학은 어땠었나? 그리 오래 지난 것도 아닌데 떠올려보면 까마득하게 먼 과거 같다. 여름엔 물놀이지, 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아이와 함께 자주 바닷가에 갔다. 가방 가득 준비물을 챙기고 아이의 손을 잡은 채 버스를 타는 건 꽤나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었지만, 막상 바닷가에 도착하면 그런 마음은 싹 사라졌다. 짙푸른 바닷물에 발을 담그고 소금 냄새가 뒤섞인 바람을 몸 전체로 고스란히 느끼고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몽글몽글해졌다. 파라솔 그늘 아래에서 아이는 모래놀이용 삽으로 땅을 파고 놀았고 나는 그 옆에서 책을 읽었다. 때로는 시에서 운영하는 야외 물놀이장에 가기도 했다. 무료이거나 단돈 몇 천 원의 입장료를 받는 야외 물놀이장이 부산 시내에 몇 군데 있었다. 좀처럼 지칠 줄 모르는 아이를 데리고 폐장 시간까지 놀고 나오던 그 여름, 다크서클이 턱까지 내려오는 것 같았지만 마음만은 뿌듯했다.

물놀이를 하러 가지 않는 날이면 아이는 주로 학교 놀이터에 가서 놀았다. 방학 중이라도 학교 운동장과 놀이터를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개방했었기 때문에, 동네 아이들은 아무 때나 학교를 드나들었고 함께 모여 술래잡기와 공놀이를 했다. 코로나 이후로는 놀이터가 폐쇄되어 적막해져 버렸지만, 그때만 해도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넘치는 공간이었다. 마스크도 거리두기도 없던 그때. 서로의 손을 아무 거리낌 없이 터치하고, 목이 마르면 친구의 물을 함께 마시기도 하던 그때. 가끔 나는 더 놀고 싶어 하는 아이를 억지로 집에 끌고 들어오기도 했는데, 돌이켜 생각하면 저녁을 좀 늦게 먹이더라도 그냥 실컷 놀게 해줄 걸 그랬나 싶다.

‘엄마가 늘 말하기를, 사람은 무엇에나 결국은 익숙해지는 것이라고 했다.’ 카뮈의 소설 <이방인>에 나오는 문장이다. 힘든 일일수록 빨리 익숙해져야 어떻게든 견디고 살아가겠지만, 마스크와 거리두기와 비대면의 일상이 어느새 몸에 배고 자연스러워진 것이 한편으로는 서글프다. 다음 여름방학에는 아이에게 여름다운 여름, 방학다운 방학을 되돌려줄 수 있을까. 하루 종일 바닷물에 몸을 흠뻑 적신 채 노는 것보다 집에서 누워 유튜브를 보는 게 더 좋다고 말하기 전에, 친구들과 땀을 흘리며 뛰어노는 것보다 태블릿 화면 속에서 고양이 군사들과 뛰어다니는 게 훨씬 익숙하다고 말하기 전에, 집 밖에서 오감으로 누리는 삶을 아이에게 되돌려줄 수 있을까. 너무 늦지는 않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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