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병삼의 타초경사(打草驚蛇)] 나는 대면 수업을 할 것이다

부산닷컴 기사퍼가기

영산대 자유전공학부 특임교수

곧 새 학기다. 나는 인문학자인데, 화면으로 만나는 비대면 수업이 불편하다. 지난 학기까지는 다급한 김에 그리해봤으나, 기술적 서투름을 넘어서 과연 이것이 교육의 올바른 방법인지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이제 코로나19 사태도 1년 반을 넘었는데, 교수님들은 몸에 익었는지 별말씀이 없다. 다시금 공부란 무엇인지를 생각해 본다.

‘공부’를 한자로 ‘工夫’라고 쓴다. 중국에서는 ‘쿵후’라고 읽는다. 우리 식으로 읽을 때 공부는 책이나 시험지를 눈으로 읽고 머리로 외고 손으로 정답을 찾는 활동이지만 쿵후로 읽는 순간 몸을 닦는 공부가 된다. 실로 이 땅의 공부는 쿵후였다. 수신(修身), 곧 ‘몸을 닦는다’에 그 뜻이 서렸다. 인문학뿐일까? 기술 공부도 마찬가지였다.

배움의 핵심은 말과 글의 전달보다는
현장에서의 직접 체험과 미묘한 접촉
마음에 즐거움 생겨야 진리도 찾아와

옛날 춘추시대, 수레바퀴 장인이 있었다. 마당에서 바퀴를 만드는데 임금님이 마루 위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장인이 물었다. “무엇을 읽고 있으시냐”고. 임금이 답했다. “옛 성인들 말씀을 읽고 있노라”고. 장인이 다시 물었다. “그 성인들이 살아있느냐”며 “죽고 없는 성인들 말씀이라면 그건 결국 찌꺼기에 불과한 것 아니냐”고 폄하한다. 화가 난 임금은 “그 까닭을 바로 설명하지 못하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라고 명한다.

이에 장인은 답한다. “바퀴 구멍을 깊이 깎으면 굴대가 헐거워서 먹히지 않고, 덜 깎으면 빡빡하여 굴대가 끼질 않습니다. 더도 덜도 아니게 정확하게 깎는 것은 손짐작으로만 터득하고 마음으로 느낄 수 있을 뿐,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성인도 핵심적인 깨달음은 책에 전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 읽고 계신 것이 옛사람들의 찌꺼기일 뿐이라고 한 것입니다.”(<장자> ‘천하’)

말로 표현하지 못할 어떤 곳에 바퀴 축의 정확한 자리가 있다면, 어찌 사물의 이치인들 말로 전달할 수 있으랴. 아, 말과 글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톱으로 썰어 나무를 켜는 방법이며, 자와 컴퍼스를 써서 모양을 다듬는 방식은 규정이 있고 규칙이 있으니 말로 가르치고 글로 배울 수 있다. 허나 그 궁극처는 손의 감촉과 마음의 느낌으로나 헤아릴 수 있다. 앎의 핵심은 말글로 전수할 수 없는 것이다. 이에 장인은 죽을 때까지 몸소 수레를 만들고 있다는 것.

이 우화가 가리키는 지점은 어디인가? 지식을 전수한다면 화면으로도 가능하나 삶과 사물의 진상을 알려면 만나서 감촉해야 한다는 것이다. 눈으로 읽고 머리로 헤아리며 정답을 찾는 짓은 화면으로든 ‘메타버스’로든 가능할지 몰라도, 새로운 세상을 열 창의성은 기계적 방식으로는 어렵다는 경고다.

공자라면 창의 교육은 ‘학이시습을 통해 불역열호’에 이르러야 한다고 할 터다. 낯익은 ‘배우고 늘 익히면 기쁘지 아니하랴’라는 말속에 해방의 지평이 들었다. 아, 이 구절을 ‘공부 열심히 해서 백 점 맞으면 기분이 좋고 부모님도 기뻐한다’라는 식으로 읽어선 안 된다. 오늘날 식으로 교과서를 파고드는 지식 공부가 아니라 배움이 나를 변모시켜 급기야 마음 깊은 속에서 기쁨이 터져 나올 때라야 진리를 획득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컨대 창의적 공부는 지식 공부가 아니라 체험을 통해서 획득하는 것이다.

그러면 지식 ‘공부’와 체험의 ‘쿵후’는 어떻게 다를까? ‘학이시습’ 가운데 습(習) 자의 윗부분, ‘羽(우)’의 모양에, 곧 새 날갯짓 모양에 주의하라고 선배들은 권한다. 어린 새는 어미의 비행하는 모습을 눈으로 보고 머리로 배우지만(이것은 비대면으로도 가능하다), 날기를 제 것으로 만들려면 익힘(習)이라는 훈련의 강을 통과할 때라야만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다음 도약에 성공할 때 창공을 비상하는 자유의 기쁨을 누릴 수 있다. 그제야 자유로운 삶, 창의적인 세계를 열게 된다(리처드 바크의 <갈매기의 꿈>에서 주인공은 육지의 매처럼 살기를 시도한다).

배움이 기쁨으로 연결되는 참교육은 스승을 몸으로 만나는 데서부터 시작한다. 그다음 오감으로 대화해야 한다. 대화는 ‘지금·여기’ 현장의 질문에서 비롯한다. 대학 수업이란 질문에 대한 해답(정답이 아니라)의 모색 과정이다.

그래서 나는 비대면 수업은 대학 교육이 아니라고 판단한다. 사람은 말로만 의사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다. 오감으로 대화한다. 특히 인문학은 사람다움(人)의 무늬(文)인 터. 서로 만나야 한다. 선생은 학생의 찌푸린 표정에서 미흡함을 읽고, 학생은 선생의 어투에서 미진함을 읽어야 한다. 그 순간, 바로 그 느낌에서야 대화의 실마리를 얻고, 그로써 온 세상에서 처음인 ‘사유’를 일궈낼 수 있다.

삶이 별것 아니듯, 진리도 지금 이곳 선생과 학생이 만나는 범속한 자리에서 피어난다. 나는 대면 수업을 감행할 것이다.


당신을 위한 AI 추천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