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낱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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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휘웅(1944~)

낱말을 품고 살았다.

낱말 뒤에 숨은

비천한 얼굴 지우기 위하여

누군가 고무신 품고

주인 기다렸다는 종놈처럼

낱말의 끝을 붙들고

낱말의 위세에 눌려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햇볕이 무늬처럼 내려오는 때

안주머니에서 나와

몸 푸는 낱말들의 행진

찢어진 살 여미지도 못한

문드러진 영혼 안고

세상 향하여 삿대질하듯

머리 풀고 있었다.

잠들지 못한 꽃밭의 울림

억측이 난무하는 비경에서

낱말들은 남루한 옷을 벗는다

-시집 (2019) 중에서-


브레히트는 꽃 피는 사과나무에 대한 감동보다는 엉터리 위정자에 대한 분노가 더욱 시를 쓰게 만든다고 했다. 서정시를 쓰기 힘든 시대에 근대적 모더니즘을 붙들고 살아온 시인이 있다. 문자 뒤에 숨어서 서정을 내세우며 세상과 타협하는 많은 시 속에서도 지난 50년간 현대적 이미지와 초현실적 일상의 틈새를 시로 메꾸려고 노력해온 시인이 최휘웅 시인이다. 비가시화된 현실을 이미지로 가시화시키려는 노력을 해온 지나온 그의 시들에 비하면 이제 그도 방법론적 모더니즘에서 회의론적 관념주의로 바뀌어가는 시풍을 이번 시집에서 보이고 있다. 이런 그의 시적 변화는 끊임없는 질문에도 대답이 없는 낱말이라는 문자의 한계 때문인지도 모른다. 낱말의 위세에 눌려 살아온 그의 시가 옷을 벗고 이제 우리에게 묻는다. “우주를 끌어안을 수 없는 문자는 생명을 가질 수 없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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