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영의 시인의 서재] 달빛 아래 술잔을 건네는 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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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시와사상’ 편집위원

지구 온난화로 인한 기후 변화 탓인지 가을 하늘이 맑지 않다. 유월 무렵에 찾아오던 장마는 기간이 짧아지고 오히려 가을장마가 이어진다. 그래도 가을은 서서히 우리 곁에 다가와 있다. 추석이 다가오면 이런저런 것들을 챙기며 마음이 분주해진다. 어릴 적에는 가족들이 거실에 모여 앉아 송편을 빚었다. 뒷산에 가서 따온 솔잎을 얹어 찐 송편의 맛이 그립다. 큰집에 갔을 때 들판에 익은 벼의 황금빛 물결과 감나무에 달린 단감도 생각난다.

둥근 달 아래서 댕기머리를 한 처녀들이 강강술래를 하는 모습은 한국화 속에서만 존재한다. 화사한 빛깔의 치마저고리를 입고 춤추던 소녀들의 웃음소리는 어디로 간 걸까. 시간은 매 순간 우리를 어디론가 데려간다. 문득 돌아보면 아득한 과거의 환영처럼 느껴진다. 사는 것이 한바탕 꿈인 것 같아 당황스러울 때가 있다. 맛있는 추석 음식을 준비하시던 어머니는 요양병원에 계시는데, 최근에 황반변성 증상이 생겨 시력이 약해지셨다. 고사리 같은 손으로 앙증맞은 송편을 빚었던 나도 중년이 되었다.

달을 떠올리면 생각나는 시인
호방한 이백과 낭만주의자 바이런
한가위 밤하늘에 뜨는 보름달
지상의 모든 존재 비추는 위로 되길

결혼한 이후에는 추석이 즐거운 행사가 아니었다. 시댁에서 구박을 하는 것도 아닌데, 명절에 시댁에 가는 것이 왠지 부담스럽고 편안하지 않았다. 가시방석에 앉은 것처럼, 가사 일에 익숙하지 않아 안절부절 불안했다. 결혼을 화분에 이식되는 꽃으로 비유하는 말에 공감이 간다. 분위기가 다른 가정에 이식되어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세월이 지난 후에는 늙어 가는 시부모님을 보면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한편으론 추석에 외국으로 여행을 떠나거나 국내 여행지를 다니는 친구들이 부러웠다.

그래도 추석이 오면 보름달은 두둥실 떠올랐다. 달을 보면 중국 당나라 때의 시인인 이백이 쓴 ‘월화독작(月下獨酌)’이란 시가 생각난다. 이 시 제목은 ‘달빛 아래 홀로 술을 마시다’란 뜻인데 시적 정황이 아주 아름답다. 코로나로 인해 술집을 가기 어려워 전국적으로 와인 판매량이 늘어났다고 한다. 와인이든 소주이건 혼술을 하는 문화가 된 상황이다. 지금은 아마도 아파트의 달을 보면서 술 한 잔을 마시지만, 이백은 경치가 수려한 곳에 앉아 달을 보며 술 한 잔을 건넸을 것이다. 이 시의 도입부에 ‘꽃 사이에 놓인 술 한 동이/ 친한 벗 없어 홀로 마시네/ 잔 들어 밝은 달을 초청하고/ 그림자까지 불러 셋이 되었구나’로 표현되어 있다. 이백은 술을 마시면서 우주와 교감하는 상상력을 멋지게 펼친다. 성품이 호방한 사람이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그가 살던 당나라의 시대 상황은 부정부패로 인한 정치적 혼란이 거센 시기였다. 그도 43세에 관직에 나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궁정에서 쫓겨나 유배되거나 옥중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그럼에도 그의 시에는 신선 같은 마음이 느껴진다. 외로운 삶이지만 유유자적하는 저 여유가 시인의 품격일 것이다. 이백은 술을 마시면서 벗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은하수까지 이어진다는 장쾌한 면모를 보여 준다.

한편 영국의 시인 조지 고든 바이런은 달과 연관된 연애시를 남겼다. 그는 날카로운 통찰과 비판 의식, 자유분방하고 유려한 문체로 낭만주의 문학을 이끈 선구자로 통한다. 귀족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수려한 외모에 패션 감각도 뛰어나 아랍풍의 옷을 입기도 했다. 바이런은 자유분방하고 우울하며 고독한 낭만주의 시인의 전형처럼 여겨진다. 그는 수많은 여성들과 연애를 했으며 마지막에는 그리스 독립전쟁에 참전하여 36세의 이른 나이에 죽게 된다. 바이런은 방랑자의 고뇌와 사회적 부조리에 반항하는 인물을 창조했으며 영국 문학사의 전설이 된 시인이다.

그는 달빛 아래를 걸으며 사랑에 관한 시를 쓰면서 ‘칼이 칼집을 헐게 하듯이/ 영혼은 가슴을 힘들게 하네/ 심장은 숨을 쉬기 위해 잠시 멈추고/ 사랑도 쉬어야 하리’라고 읊조린다. 밤은 사랑을 위해 만들어졌지만 방황을 멈추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하고 있다. 연인에게 구애하는 사랑의 행위를 달빛 아래 더 이상 하지 말자고 다짐한다. 질풍노도의 광기처럼 금기를 넘나들던 그의 사랑도 자신의 내면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이백의 호방한 성품과 바이런의 자유로운 연애사를 떠올리며, 추석날 밤하늘에 보름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린다. 찬란한 태양과 달리 소외되고 음울한 이미지를 지닌 달은 신비롭다. 은은한 달빛은 이 지상의 모든 존재를 비추고 어두운 밤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가만히 위로를 건넨다. 달 탐사로 인해 달의 신비는 하나둘 베일을 벗고 있지만, 토끼가 절구를 찧는다는 전설이 사라지지 않기를 소망한다. 홀로 술을 마시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역병의 시대이지만, 기쁨이 충만한 추석이 되기를 달에게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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