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의 시선] 진짜 같은 ‘가상인간’ 열풍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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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자리 잠식은 곤란… 사람 편의 보완하는 수단 돼야

다양한 광고 모델로 맹활약을 하고 있는 가상인간 ‘로지’와 롯데홈쇼핑의 가상 홍보 모델 ‘루시’, LG전자가 만든 가상인간 ‘김래아’(왼쪽부터). 각 인스타그램 캡처 다양한 광고 모델로 맹활약을 하고 있는 가상인간 ‘로지’와 롯데홈쇼핑의 가상 홍보 모델 ‘루시’, LG전자가 만든 가상인간 ‘김래아’(왼쪽부터). 각 인스타그램 캡처

만물의 영장인 인간을 일컫는 여러 가지 명칭이 있다. 학술 용어 ‘호모 사피엔스(homo sapiens)’가 대표적이다. 지능을 가진 사람이라는 뜻이다. 도구를 사용한다는 의미에서 ‘호모 파베르(homo faber)’로도 부른다. 인간이 동물과 차별화된 높은 지능에 힘입어 도구를 만들어 이용하는 과정에서 더 똑똑하게 진화해 온 까닭이다. 인류는 자연과 동식물에서 힌트를 얻어 수많은 도구와 장비를 발명해 쓰면서 오늘날 최첨단 과학문명 시대에 이르렀다.

인류 문명의 발전을 이끈 발명은 어떤 유형의 물건을 만드는 것만 가리키지는 않는다. 이제까지 없던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게 발명이다. 허구적 개념이나 상상의 존재를 고안하는 일을 포함한다. 기독교는 인간을 신의 창조물로 본다. 한낱 피조물인 인간이 디지털 시대를 열고는 조물주의 영역에 도전장을 내밀었다. 사이버 세상에서 무한한 생명력을 갖고 활동할 수 있는 ‘가상인간(virtual human·버추얼 휴먼)’을 탄생시킨 것. 가상인간은 언뜻 봐선 실제 인간과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다. 인간의 위대한 발명품인 가상인간의 전성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디지털 시대 인류 발명품

신의 영역 도전장 내밀어

실제 인간보다 생동감 넘쳐

사이버 가수 ‘아담’이 원조

1년에 10억 버는 모델 등장

메타버스 발전 촉매 역할

가짜 아닌 현실적 존재

사람 설 자리 빼앗을 우려

신규 일자리 창출로 가야

세계 시장 선점 노력 필요

가상인간 신드롬 주역 ‘로지’

코로나19 팬데믹 사태 속에서 두 번째 맞이한 올 추석 연휴. 이 기간 안방극장 앞에 모인 사람들의 눈길을 끈 것은 한 보험사 TV 광고였다. 광고 속 젊은 여성 모델에 대해 “진짜 사람인 줄 알았다”며 놀라는 반응이 많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에다 숲과 도심, 지하철을 넘나들며 춤추는 움직임이 진짜 사람보다 더 진짜 같은 가상인간이어서다. 지난해 8월 한국 최초의 가상 모델로 태어난 ‘로지’였다. 로지는 이미 지난 7월 초 시작한 TV 광고와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폭발적인 관심을 모으며 인플루언서(influencer·온라인 유명인)로 떠올랐다.

로지는 나이 22세, 키 171cm, 몸무게 52kg에 맞춰져 영원히 늙지 않는다. 가상인간의 장점이다. 콘텐츠 기업 싸이더스 스튜디오 엑스가 MZ세대(1980~2000년대생)가 선호하는 얼굴형을 모아 CG(컴퓨터그래픽)와 3D 합성 기술로 만든 그녀다. 출생 직후부터 SNS에서 동·서양의 이미지가 절묘하게 섞인 매력적인 외모와 강한 개성을 가진 패션모델로 활동하며 존재감을 과시하는 등 각종 미디어 플랫폼을 종횡무진 누빈다. 최근 촬영한 자동차 광고에서는 목소리까지 공개하며 더욱 인간답게 변모할 모양새다.

로지는 지금까지 패션, 호텔 등 여러 건의 광고 계약을 마쳐 1년 광고 수입만 10억 원이 넘을 것으로 보인다. 협찬 의뢰도 100건이 넘어 모두 소화하기 힘들 정도란다. 로지가 다양한 광고에서 잇따라 인기 연예인을 밀어내고 톱 모델 자리를 꿰찬 것이다. 기업의 러브콜이 쇄도할 만큼 경쟁력이 월등한 대형 스타가 등장한 셈이다. 로지의 출현으로 가상인간 열풍이 일고 있지만, 일자리를 빼앗길 수 있는 사람들 입장에서 생각하면 결코 달가운 현상은 아니지 싶다.


국내외 또 다른 유명 가상인간

1998년 국내에서 사이버 가수로 데뷔한 ‘아담’이 가상인간의 선조라고 할 수 있다. 그는 178cm 키에 용모가 수려하고 성격이 밝은 20세 남자 콘셉트로 팬클럽이 생길 만큼 돌풍을 일으켰다. 신곡 ‘제네시스(genesis)’가 담긴 앨범은 20만 장이나 팔렸다. 아담은 아쉽게도 2집 앨범 실패 후 돌연 자취를 감췄다. 대중과 소통하는 능력이 없는 사이보그 같은 기계 이미지가 단기간에 잊힌 원인이다. 하지만 당시 3D 그래픽으로 구현한 아담의 모습은 로지 같은 수준으로 진화하는 DNA가 되기에 충분했다.

로지의 인기에는 못 미치나 롯데홈쇼핑이 지난해 9월부터 메타버스(metaverse·온라인 3차원 가상세계) 사업을 위해 개발한 가상인간 ‘루시’도 유명하다. 29세 여성 루시는 지난 2월부터 SNS 활동을 시작해 2만여 명의 팔로워를 보유하고 있다. 유통기업이 자사 브랜드 홍보를 목적으로 직접 가상 모델을 제작한 첫 사례다. 롯데는 루시의 움직임과 음성 표현을 사람과 거의 비슷하게 고도화한 뒤 마케팅에 적극 활용하고 가상 쇼호스트 등으로 활동 영역을 넓힐 계획이어서 활약상이 기대된다.

올 1월 미국에서 개최된 세계 최대 IT·가전 전시회 ‘CES 2021’에선 LG전자가 디자인한 가상인간 ‘김래아’가 연설자로 깜짝 등장해 관심을 모았다. 그는 전시장 무대에서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는 모습으로 주력 전자제품을 소개했다. 2016년 미국 스타트업 브러드가 선보인 가상 모델 겸 뮤지션인 ‘릴 미켈라(Lil Miquela)’는 지구촌에서 가장 유명한 가상인간으로 꼽힌다. 300여만 명의 인스타그램 팔로워를 보유한 유명 인사로, 지난해 광고 등으로 약 130억 원을 벌어들인 것으로 추정된다. 릴 미켈라는 2019년 삼성전자의 마케팅 모델로 기용되기도 했다. 지난해 일본에선 가구업체 이케아가 도쿄 매장을 내면서 가상 모델로 내세운 ‘이마(IMMA)’가 화제를 뿌렸다.


메타버스와 동반 성장 예상

로지를 비롯한 가상인간이 뜨고 있는 이유는 스캔들 등 리스크를 걱정하지 않고 마음먹은 대로 일정을 짜고 좋은 이미지도 조성할 수 있다는 데 있다. 일부 연예인처럼 사건사고나 자질 문제로 광고, 드라마, 영화에 악영향을 줄 우려가 없기 때문이다. 로지가 넷플릭스 드라마 출연을 논의하며 활동 범위를 확대하고, NGO와 함께 환경보호 캠페인을 전개해 선한 영향력을 끼치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AI(인공지능) 기업 디오비스튜디오가 만든 ‘루이’와 미디어 전문업체 이모션웨이브의 ‘로아’는 최근 이 같은 가상인간의 이점을 내세워 각각 모델과 뮤지션 활동에 들어간 경우다.

가상인간은 메타버스에 관심이 많은 MZ세대 덕분에 인구수를 늘리며 곧 전성시대를 맞을 전망이다. 태어날 때부터 디지털 기기와 온라인 공간에 친숙해진 MZ세대가 아닌가. 이들은 사이버상에서 자신을 대신하는 분신인 아바타(avatar)조차도 가짜가 아닌 ‘또 다른 나’라는 진짜로 여겼다. IT 기술의 발전으로 VR(가상현실)보다 현실감 넘치게 구현되는 메타버스에서 아바타는 물론 실제 인간보다 더 정교한 가상인간에게 열광할 수밖에 없을 테다. 시장 조사업체 스태티스타는 전 세계 메타버스 시장이 올해 307억 달러(약 35조 원)에서 2024년 2969억 달러(약 343조 원) 규모로 커질 것으로 내다봤다. 메타버스의 급성장과 맞물려 가상인간이 새로운 먹거리로 인식되는 이유다.

가상인간의 세상이 오면, 이들을 더이상 가짜가 아니라 현실적인 존재로 받아들여야 할지 모른다. 문제는 가상인간들이 뜨거운 인기를 등에 업고 인간 고유의 영역 곳곳을 침범해 진짜 인간들이 설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점이다. 현실 세계를 파고드는 로지 탓에 일감을 잃고 있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처럼. 가상인간이 기존 일자리를 완전히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일자리를 보완해 편의성을 높이며 해당 분야의 신규 일자리를 양산하는 방향으로 발전하는 게 태어난 의미를 더하는 길일 듯하다. 이는 가상인간을 만들고 운영하는 IT 업계에 주어진 숙제다. 한편으론 국내에서 완벽에 가깝게 육성된 가상인간들이 국경 없는 혁신의 전쟁터인 글로벌 메타버스 시장의 주도권을 쥐며 우리나라 콘텐츠 산업이 세계로 확장하는 첨병이 되길 바란다.


강병균 논설위원 kb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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