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 보물창고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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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의 하루

영남 사람들에게 백제는 이국적인 나라다. 거리상으로나 정서상으로 모두 그렇다. 삼국 가운데 가장 먼저 전성기를 누렸으나 가장 먼저 사라진 고대국가, 백제 여행의 초행길이라면 역시 충남 공주다. 한성(서울)시대에서 사비(부여)시대 사이 64년간 백제의 왕도였던 곳. 우아하고 섬세한 문화 유산과 흥미진진한 고고학의 이야기와 단아한 소도시의 가을이 거기 있었다. 475년 폐허 속에서 왕위에 오른 문주왕이 공주, 당시 웅진으로 천도한 계절이 바로 지금, 10월이다.

공주박물관,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특별전
국보 12건 포함 전체 출토 유물 처음 공개
나무기둥만 남은 왕릉원 정상도 묘한 정취
공산성 아찔한 성곽길 오르면 탁 트인 풍경
원도심 제민천 주변 근대 건축물 탐방 추천


■무령왕릉과 왕릉원

지금 공주를 찾아야할 가장 큰 이유는 무령왕릉이다. 국립공주박물관이 무령왕릉 발굴 50주년을 맞아 특별전시 ‘무령왕릉 발굴 50주년, 새로운 반세기를 준비하며’에서 무령왕릉 출토 유물 124건 5233점 전체를 처음으로 공개했다. 유물 일부가 아니라 무령왕릉의 모든 유물이 다 나오는 건 지난 50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최소 한 세대 내에는 또 없을”(공수 국립공주박물관장) 기회다.

무령왕릉 발굴은 한국 고고학의 최대 사건이다. 일제강점기 송산 둔덕에서 우연히 옛 ‘송산리 고분군’ 1~6호분이 발견됐고, 6호분 뒤에서 무령왕릉이 발견된 건 그로부터 수십 년이 지난 1971년이다. 여름 장마를 앞두고 배수로 공사를 하다가 삽에 벽돌이 걸렸는데, 완전히 새로운 무덤의 입구였다.

도굴꾼이 이미 다녀간 앞선 무덤과 달리 무령왕릉이 1500년 만에 처음 온전한 형태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은 드라마틱하다. 발굴단이 들어서자마자 입구에서 뿔 달린 멧돼지 같은 돌짐승 조각이 흩어진 목관 조각과 껴묻거리 더미를 지키고 있었고, 그 앞에 무령왕의 생전 이름과 왕과 왕비의 사망·안장 연도가 기록된 묘지석 두 장이 놓여있었다. 이렇게 무령왕릉은 무덤의 주인공과 제작 연도가 밝혀진 삼국시대 최초의 왕릉이자 국보로만 12건 17점 유물이 지정된 백제의 최대 유적이 됐다.

박물관 상설전시실인 웅진백제실의 입구에서는 왕비의 머리 근처에서 발견된 동탁은잔(청동 받침과 은잔)이 관람객을 맞이한다. 금빛 연꽃 잎사귀와 봉우리 위 봉황, 잔을 감싼 용 세 마리까지 섬세하고 정교한 문양을 확인한 뒤 메인 전시실로 들어선다. 무덤에 들어온 듯 어두운 조명 아래 중앙에는 돌짐승 석수의 뒤로 3D 스캔으로 복원한 왕과 왕비의 목관이 놓였고, 주위로 관 꾸미개, 금귀걸이, 은팔찌, 청동거울 같은 국보급 유물이 빼곡하다.

기획전시실에서는 그동안 복제품으로 공개된 왕과 왕비의 나무베개·발받침 진품(교대 전시)을 놓치지 말자. 꽃잎과 봉황머리 장식 같은 각기 다른 장식이 현대적이다. 석수와 묘지석 진품, 복원돼 처음 공개되는 금동신발도 여기 있다.

문화재청은 지난달 무령왕릉이 속한 국가지정문화재의 명칭을 ‘공주 송산리 고분군’에서 ‘공주 무령왕릉과 왕릉원’으로 공식 변경했다. 무령왕릉을 넣고 백제 왕릉급 무덤의 위상을 반영한 이름이다. 왕릉 내부 관람은 1997년 영구 중지 결정됐기 때문에 박물관을 먼저 보고 물결처럼 봉분이 이어진 왕릉원 언덕을 거니는 순서가 감상에 더 효과적이다. 왕릉원 전시관에서는 실제처럼 꾸민 무령왕릉 내부 모형 공간에 들어가볼 수도 있다.

왕릉원 정상의 정지산 유적도 추천한다. 1996년 도로공사 과정에서 백제 기와 조각이 나온 것을 시작으로 무령왕릉에 사용된 벽돌와 유사한 격자무늬 벽돌, 얼음을 저장하는 빙고 시설이 발견됐다. 고고학계는 무령왕비 묘지석의 기록을 토대로 왕비의 시신을 27개월 동안 가매장한 제의시설이었다고 추정한다. 건물터 흔적을 표시한 나무기둥의 정취도, 금강과 공산성이 내려다보이는 전망도 매력있다.



■공산성의 왕궁터

해발 110m의 공산은 웅진백제의 심장이다. 공산의 능선을 따라 둘레 2660m의 성벽으로 둘러싼 공산성이 남쪽으로는 공주 시가지를, 북쪽으로는 금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더 북쪽으로는 고구려의 남하를 막아줄 차령산맥이 있어 고구려의 위협에 대비해야 하는 백제에게는 천혜의 요새였다. 여기에 웅진백제의 왕궁이 있었다.

공산성은 역사를 모르고 봐도 수려한 장소다. 입구의 금서루에서 출발해 능선의 아찔한 성곽길을 걷다보면 탁 트인 시가지 풍경과 금강 전망 사이로 쌍수정, 진남루, 광복루, 공복루 같은 정자가 잇따라 나타난다. 입구에서 성곽길에 오르는 대신 오목한 터를 지나서 공산성의 북문 공북루로 곧장 내려갈 수도 있는데, 이 곳의 너른 터는 매년 가을 열리는 백제문화제의 주요 무대이기도 하다.

공산성에서 백제의 자취를 확인한 건 오래되지 않았다. 충남도역사문화연구원이 펴낸 ‘역사의 보물창고 백제왕도 공주’를 보면 공산성은 ‘조선시대의 옷을 입고 있다’는 표현이 나온다. 백제 멸망 후 통일신라와 조선의 관청이 있었고 1894년 이후에는 ‘성안마을’이라는 거주지까지 형성되면서 백제 흔적은 땅속 깊숙이 묻힌 대신 성벽 외형과 동서남북 문터, 만하루, 광복루, 쌍수정 등이 조선 이후에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조선 인조가 이괄의 난을 피해 잠시 머문 쌍수정 일대의 백제 왕궁터는 80년대 중반 지층이 발견됐고, 2019년 대궐 문으로 추정되는 시설을 조사하면서 구체화됐다. 지금은 연못과 구덩이, 건물 터의 울타리 표지만 있는 양지 바른 산 꼭대기 평지를 오늘의 공주 시민과 여행자가 유유자적 걷는다. 이곳이 60년대는 사이클 대회장, 일제강점기에는 마장이었고, 천 년도 더 전에는 궁궐이었다는 사실은 상상력을 자극한다.



■천변과 근대 골목

백제가 너무 멀다면 한참 가까운 근대로 가자. 공산성에서 조금만 걸어가면 공주의 대표시장 공주산성시장이 나오고 시장 뒤편으로 제민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가 나타난다. 공주 남쪽에서 발원해 도심을 가로질러 금강으로 흘러드는 작은 하천 제민천은 공주 원도심의 상징이다. 길이 4km 남짓한 짧은 하천 주변으로 옛 하숙촌을 재현한 문화공간 겸 게스트하우스 공주하숙마을과 아기자기한 카페, 공방 등이 자리를 잡았다.

한때 주요 관청과 학교, 병원 등을 거느렸던 제민천은 신관동 신시가지 개발로 차츰 잊혀지다가 생태하천 조성사업과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주민 친수공간과 근대 역사 문화공간으로 거듭났다. 폭이 넓지않은 깨끗한 천변과 소박한 동네 풍경은 골목길 여행을 좋아하는 사람의 마음에 쏙 들 것이다.

옛 공주읍사무소와 중동성당은 이 일대의 대표 근대 건축물이다. 2023년이면 건축 100주년을 맞는 옛 공주읍사무소는 충남금융조합으로 건립돼 공주읍사무소, 공주시청, 디자인카페, 역사영상관 등으로 사용되다가 올 8월 공주 근대 역사 탐방의 거점으로 새롭게 개관했다. 1937년 건축된 중동성당에서는 높고 뾰족한 종탑과 아치형 문과 창문 등 중세 고딕양식을 확인할 수 있다. 충청남도역사박물관도 바로 옆에 있다.

글·사진=최혜규 기자 iwill@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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