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준현의 사람 사는 경제] 더불어 사는 삶의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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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사회경제교육연구소장

내가 고등학생이던 때니 40여 년 전의 일이다. 청바지를 한 벌 사려고 서면의 한 매장을 들렀다. 마음에 드는 옷을 찾아 둘러보고 있으려니 저쪽에서 점원이 다가와 어떤 옷을 찾느냐고 묻는다. 그런데 멀리서 보았을 때는 여성이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화장을 짙게 하기는 했지만 틀림없는 남성이다. 내가 영화나 이야기에서만 알던 성 소수자를 직접 만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대단한 사건이라도 일어났기를 기대하신다면 오해다. 나는 전혀 놀라지도 당황하지도 않았고 그저 ‘아, 성 소수자분이구나’ 생각했을 뿐이다. 그도 자연스럽게 내게 몇 벌의 바지를 권해 주었고, 나는 그 가운데 한 벌을 골라 집으로 갔다. 그리고 이내 그 일은 잊어버렸다. 세월이 가고 나도 나이가 들고 우리 사회도 변하면서 성 소수자 문제가 사회적인 쟁점이 되는 일도 잦아졌다. 성 소수자를 바라보는 인식도 많이 달라졌지만, 여전히 그들을 부정적으로 바라보는 시각도 적지 않다. 그런 분들의 생각도 당연히 존중해 드려야 옳겠지만, 성 소수자에 대한 전혀 터무니없는 오해나 무지에서 비롯된 편견을 맹목적으로 믿고 주장하는 분들에게는 많이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그럴 때마다 나는 한참 잊고 지내던 40여 년 전의 그 일을 문득 떠올리게 된다.


40년 전 성 소수자 채용한 고용주
소수자의 권리 위해 함께 싸운 용기

경기도 마트 외국인 계산원 항의에
불편하면 다른 마트 이용하라는 사장

소수자가 싫다면 어울릴 필요없지만
무분별한 편견과 혐오는 멈춰야


솔직하게 말하면 내가 나이가 들어 되돌아보게 되는 이는 내게 청바지를 골라 주던 그 성 소수자가 아니라, 그를 고용했던 그 가게의 사장이다. 여성들의 치마가 짧다고 경찰관이 자와 가위를 들고 치마 길이를 재던 야만의 시대에, 성 소수자를 고용하는 데에는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을까를 생각해 본다. 나도 어느 만큼 인생을 살다 보니 이제는 알 것 같다. 성 소수자만이 아니라 어떤 이름이든 간에 사회의 소수자로 살아가는 일도 참으로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그에 못지않게 소수자들과 더불어 살아가면서 그들이 누려야 할 당연한 권리를 찾고 지키기 위해 함께 싸우는 일은 또 얼마나 힘든가를 말이다.

경기도의 한 마트에서 외국인 계산원이 제대로 소통이 안 되고 불친절하다는 고객의 항의에 마트 사장이 불편하시면 다른 마트를 이용하라고 응대했다고 해서 논란이 되었다. 외국인이라고 표현했지만 귀화해 이미 국적은 엄연한 한국인이라고 한다. 내가 그 자리에 있지 못했으니 사정을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외국인이든 한국인이든 마트 계산원이 고객에게 아무 이유 없이 불친절하게 응대한다는 것도 이해하기 힘들고, 그런 직원을 사장이 옹호한다는 것도 고개가 갸웃거려지는 일이다.

짐작해 보면 아마 외국인 출신 계산원이 업무에 익숙하지 않아 일솜씨도 많이 느린 데다가 서로 말이 잘 안 통하니 고객의 처지에서는 많이 답답함을 느꼈을 법하다. 그래서 고객이 한국말로 채근을 하자 마음이 조급하던 계산원은 당황한 나머지 자기 나라 말로 변명을 했을 테고, 또 그 말을 못 알아들으니 고객은 계산원이 불친절하다고 느꼈을 것 같다. 누구의 잘못을 따지자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때 고객이 “아, 외국인이어서 일 처리가 좀 느리구나.” 이렇게 생각하면서 조금만 더 기다려 주었으면 계산원도 활짝 웃으면서 서툰 한국어지만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그 마트 사장의 대응이 참 존경스럽다. 고객들의 터무니없는 요구에 무조건 자기 직원들을 다그치는 고용주들이 얼마나 많은가. 외국인 계산원이 불편하면 다른 마트를 이용하면 된다. 장애인이나 노인들을 위한 복지 시설이 보기 싫으면 다른 길로 둘러 가면 된다. 성 소수자가 싫은데도 굳이 그들과 어울릴 필요는 없다. 다만 나와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 소수자들을 향해 무분별하게 쏟아내는 편견과 혐오는 멈추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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