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술 전 3명의 의사 만나 소견 들은 후 치료법 결정을”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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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승언 신임 봉생병원 명예원장

국내 대장항문외과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인 백승언 고신대복음병원 교수가 31년간 재직했던 대학병원을 떠나 최근 봉생병원 명예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봉생병원 제공 국내 대장항문외과 분야에서 손꼽히는 권위자인 백승언 고신대복음병원 교수가 31년간 재직했던 대학병원을 떠나 최근 봉생병원 명예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봉생병원 제공

주여, 때가 왔습니다.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 들판에 바람을 풀어 주소서. / 마지막 과실들이 무르익게 하시고 / 이틀만 더 남국의 햇볕을 주시어 / 열매들이 무르익도록 재촉해 주시고 / 짙은 포도주에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 지금 집없는 사람은 집을 짓지 못합니다. / 지금 홀로 있는 사람은 오래도록 그렇게 남아 /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쓰고, / 낙엽이 흩날리는 때면 불안스레 / 가로수길을 이리저리 헤맬 것입니다.

고신대복음병원서 외과의사 31년

대장항문외과 분야 최고 권위자

수술 전 철저한 시뮬레이션 수립

모든 진료의 시작 ‘기본기’ 강조

-‘가을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난 5일 김원묵기념 봉생병원으로 자리를 옮긴 백승언 명예원장은 31년간 외과의사로 재직했던 대학병원을 떠나게 된 소회를 릴케의 명시 ‘가을날’로 대신했다. “치열하고 위대한 여름은 가고 이제 포도주 속의 짙은 단맛을 더하는 이틀간의 햇빛이 되고 싶은 마음입니다.” 25세 때 전공의로 시작해 어느덧 정년을 맞이한 교수가 된 백 원장. 긴 세월 치열하게 살았지만, 그에겐 여전히 환자에게 햇빛을 비추고 싶은 열정이 엿보였다.

경북대 의대를 졸업한 백 원장은 1987년 외과 전문의가 된 후 1990년부터 고신대복음병원에서 외과의사로 한길을 걸었다. 특히 국내 대장항문외과 분야에선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권위자로 꼽힌다. 지금까지 3000여 건의 대장·직장암 수술을 집도했고, 50편 넘는 논문을 발표해 이 분야에서 일가를 이뤘다는 평가다.

그 많은 수술 경험 속 그만의 노하우가 궁금했다. 백 원장은 “다른 의사도 마찬가지겠지만, 수술 전 분석을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영상자료를 보며 암 전이 상태, 예상 출혈량, 주의할 곳 등 시뮬레이션 계획을 철저히 세운다”며 “수술 전에 70% 정도는 완료되는 셈이며, 결과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수술에 임할 때나 환자를 대할 때 의사로서 지녀야 할 자세로 백 원장은 ‘존중과 배려’를 꼽았다. 세월은 급변했지만, 과거나 지금이나 ‘생명 우선’은 변함없는 의사의 덕목임을 강조했다. 일례로 백 원장은 ‘복강경 만능주의’를 경계했다. “요즘 의사 중 일부는 보여지는 것에 가치를 두는 경향이 있다. 성형하기 편하고 절개창이 작다는 등의 이유로 웬만하면 복강경 수술을 시행하는데, 어느 정도 진행된 암의 경우 한계가 있다. 이럴 땐 겉보기나 편리함보다 재발을 막을 수 있는, 환자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수술 방식을 결정해야 한다. 예를 들면 항문 절개를 해야 할 환자에게 복강경 수술을 하면 언제든 재발할 수 있다”고 소신을 밝혔다.

또한 백 원장은 모든 것의 시작은 ‘기본기’라는 사실을 거듭 강조했다. “피부 봉합술 같은 작은 시술이라도 제대로 완벽하게 수련해야 큰 수술도 실수 없이 마무리할 수 있다. 그래서 늘 제자들에게도 기본기술의 중요성에 대해 닦달하곤 했다”고 말했다.(이러한 수술 등 자신의 30년 의사 경험을 정리한 책 ‘완벽한 한 땀을 위하여’(가제)가 곧 출간될 예정이다.)

백 원장은 환자에게 당부하는 말도 잊지 않았다. “수술해야 할 정도로 중증이면 수술 전에 3명의 의사를 만나 소견, 즉 ‘세컨드 오피니언(second opinion)’을 들어보라. 그러면 자신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알게 되고, 최선의 치료방법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이다”고 조언했다. 주치의 눈치(?)를 보느라 국내 환자들은 세컨드 오피니언을 다소 부담스러워 하나, 백 원장은 늘 자신의 환자들에게 이 같이 권유해 왔다고 한다. 이 대목은 기자에게 다소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렇다면 그가 생각하는 지역 환자의 수도권 유출 증가 원인은 뭘까. 백 원장은 “사람이나 장비가 서울이 더 우수할 거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입소문이나 인터넷을 통한 왜곡된 정보도 많다. 건강, ‘명의’를 다룬 TV 프로그램이 서울에 편중된 영향도 있다”면서 “실제로 장비나 의사 수준 차이는 거의 없다고 본다. 다만 의사의 인성이나 말투에서 오는 불신은 좀 있는 것 같다”며 안타까움을 전했다.

백 원장은 전문의 초기엔 신장이식, 위암, 유방암 등 모든 환자를 다 수술했다고 한다. 당시엔 지금처럼 외과 영역이 전문화·세분화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러다 수술이 어렵고 합병증이 잦던 대장항문과를 고신대병원에 개설해 오늘에 이르렀다.

그의 이런 다양한 경험과 의술은 마침 봉생병원에서 필요로 하는 인재상과 맞아 떨어졌다. 그는 앞으로 봉생병원에서 대장암은 물론이고 신장이식팀의 일원으로 제2 여정을 펼칠 예정이다. “가장 필요한 순간 결정적으로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고자 외과의사란 직업을 선택했고, 지금껏 후회없이 해낸 것 같다. 봉생병원에서도 그런 존재가 되고 싶다”고 각오를 밝힌 백 원장. 포도주의 단맛을 더하는 햇빛 같은 두 번째 여정을 기대해 본다.


정광용 기자 kyjeong@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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