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훈의 소아시아 기행] 왕(王)보다 등에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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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자

왕(王)과 등에. 왕은 하늘 아래 1인 권력자이고 등에는 소나 말의 등짝을 쏘는 일개 곤충에 불과하니 참으로 대조적인 연결이다. 일전에는 테스 형을 열창한 가창의 ‘황제’가 회자되더니 작금의 대선 정국에는 명색이 민주정 국가인데도 ‘왕’이 되어 보겠다는 일념으로 ‘과학과 합리와 상식’보다 미신과 주술력에 기대는 한 인물이 등장했다. 기이하고도 어이없는 일이다. 이런 사람을 지지하고 성원하는 사람들의 수치가 항상 20%를 상회하는 현상으로 나타나는 것도 기이하기는 마찬가지다. 아무래도 대한민국의 일부 트로트 애호가들과 유권자들은 ‘시민(市民)’보다는 ‘신민(臣民)’으로 살기로 작정했나 보다. 이들의 정치의식은 왕정 시대로 되돌아가 있거나 아예 있지도 않는 게 아닐까.

손바닥에 ‘왕의 승리’ 새긴 아탈로스 1세
병사들에게 용기 심은 첫 역사적 사례
끊임없이 무지 일깨우는 소크라테스처럼
등에 같은 존재 없는 한국 정치계 개탄

곤충도감이 아닌 역사의 현장에 등장하는 등에는 모두 세 마리다. 지금과 같은 외롭고 쓸쓸한 가을철에 듣기 좋은 음악으로 쇼스타코비치가 작곡한 ‘로망스’라는 사랑스러운 소곡이 있는데, 이것은 소련에서 제작된 영화 ‘등에’에 붙인 음악이다. 나아가, 이 영화는 라는 제목의 소설을 대본으로 하고 있는 바, 소설의 주인공 역시 ‘등에’라는 별명을 가지고 맹활약한다. 이 소설을 쓴 리언 보이니치가 이렇게 제목을 붙인 것은 테스 형이 아테네의 법정에서 최후 변론을 하면서 자기 자신을 ‘등에’라고, 그러니까 아테네라고 하는 굼뜬 말에 달라붙어 끊임없이 설득하고 책망하고 정신이 번쩍 들게 하라고 신이 보내신 등에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등에가 한 마리도 나타나지 않는 한국 정치계에 대한 한탄이기도 하다.

윤석열 씨가 자기 손바닥에 왕(王) 자를 적어 넣어 주술의 힘에 무한한 믿음을 보인 바 있는 올해로부터 정확히 2251년 전의 소아시아에 이와 비슷하나 조금 더 긴 글귀를 손바닥에 적어 넣은 인물이 있다. 그는 시대착오적으로 민주정 시대에 왕이라고 하는 1인 권력자의 자리를 꿈꾸는 윤 씨와는 달리 왕정 시대의 진짜 왕으로, 스미르나(터키 이즈미르·한글 성경에는 서머나)에서 북쪽으로 100여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페르가몬(터키어 지명은 베르가마·한글 성경에는 버가모)이라는 도시의 왕 아탈로스 1세였다. 두 줄기의 강물이 흐르는 페르가몬으로 갈라티아 족이 쳐들어온 건 기원전 230년, 자신들에게 조공을 바치길 거부한 아탈로스 1세를 응징하기 위해서였다. 아탈로스 1세는 갈라티아 족의 용맹함과 야만성을 두려워하는 휘하의 병사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기 위해 신들에게 제사를 지내고 짐승의 내장으로 점을 치게 하면서 자신의 손바닥에 ‘왕의 승리’라는 구절을 쓰게 한 뒤 그 손으로 희생된 짐승의 간을 만졌는데, 그 글귀가 그대로 간에 찍혔다고 한다. 이에 고무된 병사들은 용기백배하여 갈라티아 족과 전투를 벌여 크게 승리했다.

페르가몬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건 소크라테스가 아테네 법정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독배를 마신 기원전 399년의 일이다. 이때 소크라테스의 제자이자 군인인 크세노폰이 페르시아 내전에 참전했다가 그를 고용한 키로스 왕자가 전사하는 바람에 용병비도 못 벌고 1만 명의 그리스 용병을 이끌고 메소포타미아의 내륙에서 사지를 뚫고 탈출하여 이곳 페르가몬에 도착했던 것이다. 크세노폰이 이 전말을 기록한 것이 바로 또는 로 번역되는 다.

소크라테스가 감방에서 예전과 마찬가지로 친구나 제자들의 방문을 받아 고담준론을 행하고 이솝의 우화를 읽거나 시작(詩作)에 도전할 수 있었던 것은 예기치 않게 사형 집행 시점이 늦춰졌기 때문이다. 필자의 예전 칼럼 중 ‘에게해의 동편, 스미르나’를 기억할지 모르겠다.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가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쳐지는 일곱 쌍의 젊은이들과 함께 크레타 섬으로 향하는 배에 올랐을 때, 아테네 사람들은 인신 제물로 보내는 이 사람들이 살아서 돌아오면 해마다 델로스에 그 배로 공식 사절단을 보내기로 아폴론 신에게 맹세했다. 그런데 아테네에는 사절단을 보낼 준비를 시작하는 날부터 배가 델로스에 갔다가 다시 돌아오는 날까지 정결을 위해 국가가 공식적으로 사형 집행을 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었다. 그리고 사절단을 태운 배가 항해 중에 거센 풍랑을 만나면 종종 사형 금지 기간이 상당히 길어지기도 했다. 사절단을 보내는 의식은 아폴론 사제가 배의 끝부분을 화환으로 장식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데, 이 일이 소크라테스가 재판을 받기 전날에 행해졌기 때문에, 그는 재판이 끝난 후에도 한참 동안 감방에 있으면서 여러 가지 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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