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모두를 위한 페미니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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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지연 사회부 차장

“여자는 고추가 없어?” 6살 아들의 뜬금없는 질문. 유치원 성교육 시간에 반만 들었나 보다. “없는 게 아니라 있는데 안 보이는 거야. 남자랑 다르게 생겼고, 몸 안에 있어.”

최근 고 변희수 하사가 생전에 제기했던 전역 처분 취소 청구소송에서 1심 승소 판결이 났다. 판결의 취지가 인상적이다. 성전환 수술 후 상태를 남성성의 결여로 볼 것이 아니라 여성으로 인정해, 여군으로서 복무 가능 여부를 판단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판부는 남성 성기를 기준으로 변 하사의 성별을 구분한 육군의 좁은 견해를 지적했다. 남성이 없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있는 것이라고. ‘관점의 전환’을 요구한 의미 있는 판결이 변 하사의 죽음 후에 나온 것이 안타깝다.

고 변희수 하사 전역 조치 부당 1심 판결
사회에 ‘관점의 전환’ 요구한 의미 있는 주문
불안과 게으름에서 비롯된 편견은 비용 초래
부산일보 젠더데스크 도입해 성차별 방지 노력

특정 성별이 중심인 세상은 누군가에게 지독한 비극이다. 그리고 때로는 우스꽝스럽다. 몇년 전 독일의 한 언론에 Z세대와 메르켈 총리에 관한 기사가 실렸다. 16년 동안 집권한 독일 역사상 최장수 총리가 여성이어서, 그의 재임시절 태어난 Z세대는 “남성도 총리가 될 수 있나요?”라는 질문을 던진다는 것이다. 기사에 등장한 10대들은 남성 총리를 상상하기 힘들다고 했다. 한 소년은 “남성은 술도 많이 마시고 책임감도 부족하다”고도 했다.

소년의 발언에 실소가 나왔다. 남성이 총리 결격 사유라니, 성별과 총리의 자격을 연결 짓는 논리적 비약이란! 한편으론 씁쓸했다. 어른의 편견은 아이들과 얼마나 다른가?

흥미로운 대목은 편견과 경험치의 상관관계이다. 여성 총리만 경험한 이들에게 남성 총리는 미지의 대상이라 불안하다. 불안은 기존 방식이 옳다는 편견을 통해 해소된다. 많은 편견과 차별은 그런 식으로 작동한다. 여성 국가 원수를 반대하는 논리도 마찬가지다. 편견에 머물러 있다면 불안은 해소되지만, 더 나은 선택을 경험할 기회를 잃어버린다. 총리로서 자질이 뛰어난 이가 남성이라는 이유로 거부당한다면, 그 나라에 불행한 일이다.

성차별의 사회적 비용을 줄이기 위한 노력이 각계에서 진행되고 있다. <부산일보>도 지난해 말부터 편집국에 젠더데스크 제도를 도입했다. 젠더데스크는 기사 등 콘텐츠 전반을 젠더 관점에서 살펴본다. 문제가 발견되면 담당 기자나 데스크, 국장단과 논의를 거친다. 옆에서 지켜보니 젠더데스크의 노동 강도는 상당하다. 투명한 안경을 쓰고 있다고 말하면, 안경이 어디에 있냐고 반문하는 식이다. 안경 쓴 이도 답답하다. 도대체 뭐가 문제라는 말인가? 논쟁은 반복된다.

사회부 기사도 젠더데스크의 주된 논의 대상이다. 나름 젠더 감수성이 높다고 자부하지만, 사회부 기사의 문제가 지적될 때는 관습적 견해에 빠지곤 한다. 최근에는 코로나19 이후 실내 운동 할 때나 입던 레깅스를 외출복으로 많이 입는 세태를 다룬 기사가 논의 대상이 됐다. 기사 취지는 ‘민망하다’는 의견과 그런 시선 자체가 문제라는 의견이 공존한다는 것이었다. 이 기사를 두고 ‘민망하다’는 의견을 기사화하는 것 자체가 여성의 몸을 억압하는 시각을 용인할 우려가 있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이미 기사는 지면에 배치됐고, 대체할 만한 기사도 마땅치 않았다. ‘과도기적 현상이니 기사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는 궁색한 논리도 갖다 댔다. 내용을 수정하고 밸류를 대폭 나춰 기사는 신문 지면에 게재됐다.

기사가 나간 후 ‘잘한 일인가’ 의문이 들었다. 여성의 젠더감수성이 더 높을 것이라는 기대 역시 편견일 수 있다는 것을, 부끄러움을 통해 깨달았다. 어느 후배는 “정신 줄 놓지 말고 ‘뇌의 텐션’을 유지하라”고 일침을 가하기도 했다. 편견이 상식으로 둔갑하는 데에는 게으름도 한 몫 한다.

젠더데스크 덕분에 부산일보 편집국은 젠더 이슈를 예전보다는 사려 깊게 다룬다. 그 와중에 웃지 못할 일들도 종종 생긴다. 얼마 전 한 해경이 해임된 것을 두고 ‘옷을 벗었다’는 제목이 달렸다. 데스크는 ‘혹시 젠더 관점에서 문제가 되는지’ 진지하게 질문했다. 낙동강변에서 희귀 잠자리 암수가 교미하는 장면을 포착한 사진이 젠더데스크 자문 대상인가 하는 논의도 있었다. 젠더에 대한 오해가 낳은 ‘웃픈’ 일들이다.

“페미니즘은 본질적으로 사회 참여나 생활 전반에 있어서 남녀가 평등하다는 사실에 관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페미니스트라고 할 수 있다.” 지난달 초 메르켈 총리가 처음으로 페미니스트라 선언해 화제가 됐다. 퇴임을 앞두고 뒤늦게 나온 발언이라는 비판도 있지만, 총리직을 수행하며 탁월한 리더십으로 페미니즘을 대변해왔다는 평가가 나온다. 젠더 이슈나 페미니즘의 지향점을 메르켈의 발언에서 참고한다. ‘성별이 차별의 근거가 되지 않아야 한다’는 본질에 다가가려는 노력이라면, 어떤 논의든 일단 방향은 바르게 잡은 것이다. sjy@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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