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사람’ 노태우 전 대통령, 탈냉전 북방외교 지평 열었지만 군부독재 연장선 꼬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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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전 대통령이 1990년 12월 14일 옛 소련 크렘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과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고 있다. 연합뉴스

26일 사망한 노태우 전 대통령은 1979년 12월 12일 육사 11기 동기생 전두환 전 대통령과 함께 군사쿠데타를 주도, 신군부 2인자로 등장하며 정계에 입문했다. 초대 체육부 장관, 서울올림픽조직위원장을 지냈고 1987년 6월 10일 잠실 체육관에서 치러진 전당대회에서 민정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됐다. 전두환 정권의 간선제 호헌 조치에 반발하는 시위가 확산하자 직선제 개헌을 약속하는 6·29 선언을 발표 ‘1987년 체제’ 탄생시키며 민주주의 정착 토대를 만들었지만, 김영삼·김대중 분열로 대통령에 오른 뒤 일련의 비민주적인 조치로 군부독재의 연장선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신군부 2인자로 정계에 입문
전교조 불법화 등 민주주의 퇴보
첫 고위급 회담·비핵화 선언 등
남북관계 개선의 디딤돌 평가
현대사 어두운 한 면 감옥행도

당선 뒤 1990년 여당인 민정당과 야당인 김영삼(YS)의 통일민주당, 김종필(JP)의 공화당을 합치는 기습적 3당 합당으로 거대 여당 민주자유당을 탄생시키며 호남을 고립시키는 배타적 지역주의를 심화시켰다는 비판에도 자유롭지 못하다. 반(反)정부 인사목록을 만들어 국군보안사령부를 통해 사찰했고, 재임 시절 전교조를 불법 단체로 규정해 1500여 명의 교사를 무더기로 파면·해임하는 등 일련의 행보도 민주주의를 퇴보시킨 대목으로 꼽힌다. ‘보통사람 노태우’를 슬로건으로 내걸고 토지공개념을 도입했다.

밖으로는 남북 유엔 동시 가입, 88 서울올림픽 개최 등 성과를 내며 외교 지평을 넓혔다. 첫 남북 고위급 회담 성사, 남북 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선언 채택 같은 남북관계 개선의 디딤돌도 쌓았다. 1990년 6월 소련과 정상회담을 가진 뒤 9월 전격 수교했고, 1992년 8월에는 중국과 국교 정상화로 사회·문화·경제적 교류를 급격히 증가시키는 발판을 마련했다. 퇴임 후 12·12 주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무력 진압, 수천억 원 규모의 비자금 조성 등의 혐의로 전 전 대통령과 함께 수감됐다. 법원에서 징역 17년형과 추징금 2600억여 원을 선고받는 등 한국 현대사의 어두운 한 면을 장식했다. 1997년 12월 퇴임을 앞둔 김영삼 대통령의 특별사면 조치로 석방됐다.

노 전 대통령 사망에 대해 여야 대선 후보들은 영면을 기원하면서도 역사적 평가에는 신중한 태도를 보였다.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대선 후보는 “나중에 캠프와도 상의해 보고(입장을 밝히겠다)”라며 입장을 유보했다. 국민의힘 경선 주자인 홍준표 후보는 “가장 잘한 정책은 북방정책과 범죄와의 전쟁이었다”며 “영면을 기원한다”고 했다. 유승민 후보는 “부디 평안히 영면하시기 바란다”며 “유가족에 깊은 위로의 말씀을 드린다”고 했다. 윤석열 후보는 “외교 지평을 열어주신 것은 의미 있는 성과”라며 “영면을 기원한다”고 했다. 원희룡 후보는 “고인의 영면을 기원하며 큰 슬픔을 마주하신 유가족께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한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 장례가 국가장으로 치러질지 여부는 그가 현저한 공훈을 남겼는지 등에 대한 임시 국무회의 심의와 문재인 대통령의 결정을 통해 가려진다.

민지형 기자 oasis@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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