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해까지 모신 통영, 윤이상은 아직도 불편한 존재?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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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청 홈피에도 묘역 안내 없고
이정표 안 보여 물어물어 참배

통영국제음악당 뒤뜰에 마련된 윤이상 선생 묘역. 생전 ‘고향 바다를 다시 보고 싶다’던 선생의 뜻에 따라 택한 장소다. 묘역은 98㎡ 면적에 봉분 없이 꾸몄다. 나지막이 얹은 너럭바위에는 한자 초서체로 ‘처염상정(處染常淨)’을 음각했다. 처염상정은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의미한다. 오른쪽은 1992년 윤이상. 부산일보 DB 통영국제음악당 뒤뜰에 마련된 윤이상 선생 묘역. 생전 ‘고향 바다를 다시 보고 싶다’던 선생의 뜻에 따라 택한 장소다. 묘역은 98㎡ 면적에 봉분 없이 꾸몄다. 나지막이 얹은 너럭바위에는 한자 초서체로 ‘처염상정(處染常淨)’을 음각했다. 처염상정은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의미한다. 오른쪽은 1992년 윤이상. 부산일보 DB

“‘상처 입은 용’은 고향에 와서도 상처가 치유되지 못한 채 웅크리고 있다.”

간첩으로 몰려 머나먼 타국에서 생을 마감한 비운의 천재 음악가 윤이상(1917~1995). 사후 23년 만인 2018년, 그토록 바라던 고향 통영에 묻혀 영면에 들었지만 해묵은 이념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선생의 묘소는 아직 대중의 반감이 적지않다는 이유로 올해도 외딴곳에서 쓸쓸히 겨울을 맞고 있다.

통영시에 따르면 윤이상 선생의 유해는 통영 앞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도남동 통영국제음악당 뒤뜰에 묻혔다. 생전 ‘고향 바다를 다시 보고 싶다’던 선생의 뜻에 따라 택한 장소다. 묘역은 98㎡ 면적에 봉분 없이 추모 공간으로 꾸몄다. 나지막이 얹은 너럭바위에는 한자 초서체로 ‘처염상정(處染常淨)’을 음각했다. 처염상정은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의미한다. 1995년 윤 선생 타계 직후 49재를 지내려 독일을 찾은 설정 스님이 묘비에 직접 쓴 경구다. 그리고 그 아래 ‘윤이상’ 한글과 영문(ISANG YUN) 이름, 생몰 연도를 새겼다.

하지만 일반인이 묘역을 찾아 참배하기란 쉽지 않다. 거대한 음악당 건물에 가린 데다, 이정표는 눈에 잘 띄지 않는 탓이다. 통영시청 인터넷 홈페이지에도 묘역에 대한 안내는 없다. 어렵게 현장을 찾은 이들은 “애써 감춰 놓은 느낌”이라고 했다. 물어물어 왔다는 한 방문객은 “한참을 돌았다. 이정표는 있는지도 몰랐다”고 했다.

통영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마련된 윤이상 선생 묘역. 김민진 기자 통영 바다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자리에 마련된 윤이상 선생 묘역. 김민진 기자

통영시는 묘역 훼손 우려가 커 적극적으로 알리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실제로 선생의 유해 송환 당시 지역에서도 찬반이 엇갈렸다. 지역 문화예술계는 반색했지만, 보수단체는 선생의 행적과 이념에 대해 강한 거부감을 드러냈다. 안장 후 시민사회가 마련한 추모식에선 일부 단체가 묘역 인근에서 집회를 열고 묘역 철거를 요구했다.

통영시 관계자는 “이후에도 묘역에 해코지하는 불상사가 일부 발생했었다”며 “유족도 고인의 뜻을 존중해 최대한 조용히 지냈으면 하는 바람이라, 가능하면 드러내지 않으려 한다”고 전했다.

하지만 반대나 거부감 역시 소통의 표현인 만큼 있는 억지로 막으려 해선 안 된다는 지적도 나온다. 불편하다고 감출 게 아니라 누구나 찾을 수 있는 열린 추모의 공간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활동 중인 강제윤 시인은 “위해를 당할까 걱정돼 쉽게 찾을 수도 없는 궁벽한 구석에 두는 것은 불편한 존재라 숨기려는 처사일 뿐”이라며 “그럴수록 더 공개적인 광장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윤이상 선생 덕에 통영은 유네스코 지정 음악 창의도시가 됐고, 해마다 국제음악제·국제음악콩쿠르를 열어 세계만방에 이름을 알릴 수 있게 됐다”며 “지금이라도 선생의 묘역이 여기에 있다고 당당히 알려야 한다. 그래야 선생의 상처가 조금이라도 치유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윤이상 선생 묘역은 98㎡ 면적에 봉분 없이 추모 공간으로 꾸몄다. 나지막이 얹은 너럭바위에는 한자 초서체로 ‘처염상정(處染常淨)’을 음각했다. 처염상정은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의미한다. 1995년 윤 선생 타계 직후 49재를 지내려 독일을 찾은 설정 스님이 묘비에 직접 쓴 경구다. 그리고 그 아래 ‘윤이상’ 한글과 영문(ISANG YUN) 이름, 생몰 연도를 새겼다. 김민진 기자 윤이상 선생 묘역은 98㎡ 면적에 봉분 없이 추모 공간으로 꾸몄다. 나지막이 얹은 너럭바위에는 한자 초서체로 ‘처염상정(處染常淨)’을 음각했다. 처염상정은 ‘진흙탕 속에서 피어나지만, 결코 더러운 흙탕물이 묻지 않는 연꽃’을 의미한다. 1995년 윤 선생 타계 직후 49재를 지내려 독일을 찾은 설정 스님이 묘비에 직접 쓴 경구다. 그리고 그 아래 ‘윤이상’ 한글과 영문(ISANG YUN) 이름, 생몰 연도를 새겼다. 김민진 기자

한편 1960년대부터 독일에 체류하며 베를린 음대 교수를 역임한 윤이상은 1972년 뮌헨 올림픽 개막 축하행사로 무대에 올린 오페라 '심청'이 성공을 거두면서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유럽 평론가들은 '20세기 중요 작곡가 56인' 중 한 명으로 꼽았고, 생전엔 '유럽에서 현존하는 5대 작곡가'에 선정되기도 했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1995년, 독일의 한 방송은 그를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중요한 작곡가 30인'으로 뽑았다. 특히 미국 뉴욕 브루클린음악원 건물 동판에 새겨진 위대한 음악가 44명 중 한 명이기도 하다. 44명 중 20세기 음악가는 윤이상을 포함해 네 명뿐이다.

하지만 국내에선 1967년 '동백림(동베를린) 간첩단 사건'에 연루돼 2년간 옥고를 치른 뒤 추방됐다. 이후 간첩으로 낙인찍힌 채 1995년 3일 11월 베를린에서 타계했다. 사후에도 이념 논란에 시달리며 국내에선 선생의 이름을 거론하는 것조차 금기시됐다.

2006년 과거사진실규명위원회 조사를 통해 동백림사건은 독재정권에 의한 조작된 것으로 결론 났지만, 경제학자 오길남 박사에게 입북을 권유했다는 주장이 뒤늦게 제기되면서 논란은 계속됐다.

변화의 기류가 감지된 건 윤이상 탄생 100주년을 맞은 2017년 문재인 정부가 들어서면서다. 7월 독일에서 열린 'G20 정상회담'에 문 대통령과 동행한 영부인 김정숙 여사가 선생의 묘소를 참배한 게 결정적이었다. 당시 김 여사는 통영에서 공수한 동백나무를 선생 묘소 옆에 심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윤이상의 이름이 재조명받기 시작했고, 유해 귀환까지 성사됐다.


김민진 기자 mjk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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