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여는 시] 마른 풀에 베인 뺨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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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자(1958~ )

집 없는 짐승이라 찾으러 갈 곳 없다

노을을 보려고 달려온 것 아니어서 갯벌이 검다

바다도 먼바다에서 돌아오고 있는데

너 없으니 내 몸이 얼음이다 너를 지워야겠다

거친 바람은 시간의 깊이를 훤히 알아

몇 오라기 갈대를 검은 섬 쪽으로 밀고 간다

쓸려가지 않으려고 키를 낮춰 운다

조개를 캐듯 슬픔을 뒤지는데

처박혔던 폐선이 어릿어릿 살아나

어디 바다에는 속살속살 눈 온다 하고 해당화가 핀다

다음 생은 우리 없는 걸로 하자

마른 풀에 베인 뺨의 상처도 알아채지 말자

내가 걸은 길 다 합하면 그대가 된다

-시집 (2018) 중에서


글을 쓰다가 종이에 손을 베인 적이 있다. 고통 없이도 피가 나는 걸 보고는 입으로 베인 손을 빨면서 생각한다. 아프지 않고도 피가 날 수 있구나. 사랑의 상처가 모두 고통을 수반하는 것은 아니다. 힘든 일을 하다가 어이없이 만나는 상처도 그렇다. 숨어서 찾아든 은둔의 갈대 숲에서 마른 풀에 뺨을 베일 때 받은 상처는 피가 나도 그렇게 아프지 않다.

슬픔은 스스로 발효되는 일상의 음식이다. 큰 슬픔에 젖어 찌든 삶을 살 때에 작은 슬픔은 사치가 된다. 고통은 사랑이라는 음식을 먹고 나서 발부되는 계산서이다. 큰 고통에 젖어서 지내는 삶 속에 작은 고통도 사치가 된다. 그러나 큰 고통, 큰 슬픔이 우리 삶을 유도해 가는 것이 아니고 모른 척 넘어가며 지내온 작은 슬픔, 작은 상처가 기실 우리 삶의 대부분을 이루고 있다. 알고도 모른 척 넘어가는 그 작은 아픔을 다 합치면 그대가 된다.

이규열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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