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광명의 정견만리(正見萬理)] 올해 대선, 이대로 끝나도 괜찮은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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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위원

“지하철 초읍선 신설!” “구덕운동장 멀티스포컴플렉스 추진!”

거리에 보이는 올해 대선 플래카드 문구인데, 도대체가 이상하다. 오는 9일 선거가 대통령선거인지 지방선거인지 당최 헛갈리는 것이다. 지지율 1, 2위를 다투는 후보들이 내세우는 공약이 국가와 민족의 미래를 논하는 거창한 무엇이 아니라 동네 민원 따위나 해결하려는 쪼잔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미래 논하는 시대정신 보이지 않고
기초지자체 단위 공약 전면에 나서
대선 걸맞은 정책과 의제 실종되고
요지부동의 진영 간 대결만 펼쳐져
유권자는 특정 인사 당선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 위해 한 표 행사해야

예전 대선은 안 그랬다. 이른바 시대정신이란 게 있었다. 시대정신은 당대가 요구하는 공동체적 가치이자 과제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대통령 직선제가 실시된 1956년 제3대 대선. 당시 시대적 요구는 한국전쟁 후 피폐한 삶에 찌든 국민에게 희망을 심어 주는 것이었다. 현직 대통령이던 이승만 후보는 “구관이 명관”이라 우겼지만 야당의 신익희 후보는 “못살겠다 갈아보자”며 정권교체를 외쳤다. 유세 중 신 후보가 서거하는 바람에 좌절됐지만, 당시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요구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5·6대 대선에선 박정희 후보는 ‘조국 근대화’를 내세워 당선됐고, 7대 대선에선 김대중 후보의 ‘장기집권 종식’이 화두가 됐다.

1987년 13대 대선은 ‘민주화’가 시대정신으로 대두했고, 1992년 대선에서는 ‘군부통치 종식’, 1997년 대선에선 ‘IMF 사태 극복’, 2002년 대선에선 ‘반칙과 특권 없는 정의로운 사회’가 국민 마음을 두드렸다. 2007년엔 ‘경제대국 진입’, 2012년엔 ‘경제민주화’ 구호가 전면에 섰다. 2017년 국정농단 사건으로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직후 치러진 19대 대선은 ‘적폐 청산’ 대선으로 요약된다.

거듭 말하지만, 이번 대선은 참으로 이상하다. 유별난 혹자의 말이 아니라 다수 정치 전문가의 분석이다. ‘코로나19 위기 극복’이라는 당면한 최대 난제가 있는데, 다들 절실한 시대의 화두로 잡지를 않는다.

한 대선 후보는 열차에서 맞은편 좌석에 구두를 신은 채 발을 올려놓았다가 비판 여론이 일자 “장시간 이동으로 생긴 경련 때문”이라는,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해명을 내놓는다. 그러고는 상대 당 후보가 식당에서 담배를 피우는 오래전 사진으로 반격한다. 매번 이런 식이다. 치밀한 고민이나 일관된 비전은 없이 그때그때 급조한 약속과 처신만 보인다. 사드 추가 배치나 대북 선제타격을 공언한 야당 후보가 느닷없이 자신이 햇볕정책으로 상징되는 ‘DJ 정신’에 가깝다고 주장한다. 여당의 대표는 대선일이 임박한 즈음에 다당제를 포함하는 정치개혁안을 발표했다. 스스로 “처절하다”고 했지만 “구차하다”고 욕하는 이도 있다.

후보들 사이에서 이번 대선이 어떤 시대적 의미를 가지고 있고 향후 5년간 국정을 어떤 방향으로 이끌지 서로 묻고 따지는 모습은 찾아보기 어렵다. 자신이 왜 대통령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국민을 설득하지 못하고 오로지 상대 후보가 되면 큰일 난다고 외친다. 녹취록만 난무하는 진흙탕 선거에서 건설적 담론 따위는 끼어들 자리가 없다. “정말 건드려야 될 큰 문제는 안 건드리고 개별적인 문제들만 가지고 씨름하는 것 같다. 시대는 어마어마한 전환기에 들어가고 있는데 대통령이 되겠다는 분은 그 무게를 거의 의식하고 있는 것 같지 않다”는 한 전직 장관의 한탄이 범상하게 들리지 않는다.

사정이 그러하니 유권자들도 후보들의 정책이 얼마나 구체적이며 실현 가능한지 따지기보다 그들의 행동이나 실언, 후보 배우자의 행적에 일희일비한다. 대중을 확 끌어들이는 시대정신이 없다 보니 요지부동의 진영 대결만 펼쳐진다. 특정 후보가 싫으면 끝까지 싫은 것이다. 그러니 유력 두 후보에게 과거 같으면 천하 대사건으로 취급될 악재가 터져도 지지율은 그다지 변동이 없고 막판까지 누가 이길지 모르는 상황이 진행 중이다. 여론조사 전문가들이 “이례적이다. 기존 선거 공식이 잘 들어맞지 않는다”며 고개를 흔드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올 대선이 이대로 끝나서는 안 된다. 지금은 코로나19, 우크라이나 전쟁과 신냉전, 기후위기 등으로 인한 대전환의 시대라고 한다. 이런 눈앞의 현실과 다가올 미래를 함께 바라보면서 방향을 제시하는 게 당금의 시대정신일 테다. 하지만 지금 대선 국면에서 거기에 대응하는 정책·비전은 보이지 않고 상대에 대한 무조건적인 반대와 증오만 보인다. 이대로는 우리의 앞날은 암울할 뿐이다. 후보들이 안 된다면 유권자가 각성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책임은 후보만이 아니라 유권자에게도 있다. 유권자의 한 표는 후보가 아니라 미래를 담보하는 시대정신에 던져져야 한다. 한 표의 행사로 우리가 보고 싶은 것은 특정 인사의 당선이 아니라 시대의 변화이기 때문이다. 선택지가 없다고? 정말 그런가? 찬찬히 두루 살펴보시라. 어디엔가 답이 있을 것이다. kmyim@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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