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 시골 마을, 시간이 멈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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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 군위 ‘리틀 포레스트’의 향기

임순례 감독이 메가폰을 잡고 인기 배우 김태리가 주연한 ‘리틀 포레스트’라는 영화가 있다. 2018년에 개봉해 관객 150만 명을 동원한 영화다. 이 영화의 무대는 한적하고 조용한 시골마을의 낡은 집이다. 경북 군위군 미성 1리가 바로 그곳이다. ‘리틀 포레스트’의 흔적을 따라 군위를 한 바퀴 돌아본다.

 김태리 주연 ‘리틀 포레스트’ 촬영지 따라 여행
 낡은 촌집엔 영화 속 장면처럼 곶감이 주렁주렁
 거실 앉아 주방 보면 음식 만들던 장면 떠올라
 86년 된 간이역 ‘화본역’은 네티즌 인기 명소
 높이 25m 급수탑엔 ‘삼국유사’ 주제 이색 조각
 느긋하게 걷다 보면 얼마나 편안한지 절로 체감

■리틀 포레스트

오고가는 차들이 드문 시골길을 달린다. 급히 달리려고 서두를 필요는 없다. 차창을 내리고 이른 봄 공기를 마시면서 느긋하게 운전대를 돌리면 된다. 목적지는 군위군 우보면 미성5길 58-1이다.

너른 평야를 지나 작은 개울이 흐르는 다리를 건너면 아담한 시골마을이 나타난다. 한쪽 구석에는 혼자 떨어진 낡은 집이 보인다. 이곳이 바로 ‘리틀 포레스트’의 무대가 됐던 곳이다. 서울에서 고생하다 고향으로 돌아온 주인공 혜원이 엄마의 추억이 서린 여러 가지 음식을 만들어 친구들과 나눠 먹으며 자신의 인생을 찾아가던 장소다.

나지막한 흙담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면 영화에서 미성리의 봄, 여름, 가을, 겨울 4계절을 보여줬던 들판이 너르게 펼쳐져 있다. 뒤편으로는 혜원이 밤을 따고 나물을 캐러 다녔던 산이 집을 에워싸고 있다. 차분한 들판의 바람과 고요한 산의 공기는 혜원의 집 곳곳을 돌아다니고 있다.

영화에서 곧 무너질 것처럼 낡았던 기와지붕은 깔끔하게 수리돼 있다. 처마 끝에는 혜원이 집을 떠나기 전 깎아놓은 것처럼 곶감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그녀가 감자나 각종 채소를 키우던 집 앞 텃밭은 아직 초봄이어서인지 썰렁하게 비어 있다.

집 안으로 들어가 본다. 채 열 평도 안 되는 작은 집은 영화에 사용됐던 그대로 보존돼 있다. 입구 쪽의 작은 방 하나와 안쪽의 아늑한 주방 그리고 아주 낡아 오랜 세월의 분위기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여러 가구 등이다. 거실에 앉아 주방을 바라보면 밝은 표정의 혜원이 고소하고 달콤한 향기가 풍기는 팥떡을 찌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든다.

영화 속에서 혜원이 그랬던 것처럼 잠시 마루의 턱에 앉아본다. 강아지 오구가 꼬리를 살랑거리던 창고 앞에는 여성 관람객 여러 명이 모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영화에서 본 이야기를 나누는가 싶었지만 대선을 주제로 열을 올린다.

그들의 목소리가 더 커지기 전에 서둘러 집에서 나온다. 차를 몰고 다리를 건너간다. 한쪽 구석에 차를 세우고 개울을 따라 농로를 걸어간다. 개울 건너편으로 방금 들어갔던 혜원의 집이 보인다. 뒤를 돌아보면 가을에 황금색 벼가 파도처럼 일렁이던 들판이다. 개울을 따라 흐르는 물소리만 아니라면 마치 앞뒤의 공간에서 시간이 멈춰버린 느낌이다.



■화본역

따스한 봄 햇살을 받으며 혼자 조용히 벤치에 앉는다. 긴 플랫폼에 사람이라고는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느낌이다. 평화로운 적막을 망치지 않으려고 심지어 바람과 나뭇가지마저 숨과 소리를 죽이고 있다. 긴장했는지 화살처럼 흐르던 시간도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낯선 이가 명상에서 깨어나기만 기다리고 있다.

이곳은 ‘리틀 포레스트’에서 혜원의 어릴 적 친구 재화가 도시에서 살 때 사귀었던 옛 여자 친구를 떠나보낸 화본역이다. 혜원의 집처럼 시간이 정지된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이다. 하루에 여섯 번 중앙선을 오가는 열차를 제외하면 이곳에서는 움직이는 물체를 보기조차 쉽지 않다. 유명 관광지로 탈바꿈한 뒤부터 주말이 되면 적지 않은 사람이 사진을 찍기 위해 이곳을 찾는다. 하지만 이들조차도 그 자리에 멈춰버린 시간을 움직이게 하지는 못한다. 오히려 그들조차 정지된 시간의 세계에 동화돼 버린다.

화본역은 군위군 산성면 화본리에 자리를 잡은 중앙선의 간이역이다. 1936년 완공했으니 올해로 86년이나 된 곳이다. 이곳을 지나던 기차는 과거에는 시장이 없던 산성면 주민들이 신녕시장과 영천시장에 갈 때 이용하던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장날이 되면 손에 머리에 보따리를 들고 멘 주민들이 힘겹게 열차에 오르는 모습이 펼쳐지곤 했다. 오후 무렵이 되면 역 앞에는 장에 다녀오는 아버지, 어머니를 기다리는 아이들이 서성거리기도 했다.

2011년 군위군과 코레일이 ‘화본역 그린 스테이션 사업’을 통해 화본역의 옛 모습을 재현한 덕분에 이곳은 유명 관광지로 떠올랐다. 역 건물은 일제강점기 건축양식을 그대로 보존했다. 뾰족한 지붕의 일본식 건물은 현대적인 건물에 익숙한 어린이, 젊은이에게는 낯선 풍경이었다. 나이든 사람에게는 오래된 추억으로 다가왔다. 그 덕분에 네티즌에게서 ‘가장 아름다운 역사’라는 평가를 받게 됐다.

철길을 건너 논길을 잠시 걷는다. 까마득할 정도는 아니지만 꽤 높은 탑 모양 건물이 나타난다. 화본역을 지으면서 함께 건설한 높이 25m의 급수탑이다. 과거 증기기관차에 물을 제공하던 시설이었다. 중앙선은 지형이 험한 경북 내륙에 만들어진 철로다. 기차가 고개를 넘으려면 동력을 최대한 끌어올려야 했다. 증기기관차는 화본역에 멈춰 물을 가득 채운 다음 다시 힘을 내 고개를 넘었다. 전국 여러 역 중에서 급수탑이 남아 있는 곳은 화본역과 경남 밀양의 삼랑진역을 포함해 몇 군데 되지 않는다.

급수탑 안에는 를 소재로 한 이색적인 조각 두 개가 자리를 잡고 있다. 한가운데에는 임도훈 작가가 기린과 나비를 소재로 제작한 ‘설화가 시작되다’가 서 있다. 기린상은 군위의 유명 사찰인 인각사에 있는 것을 상징한다. 나비는 화본마을에 의 전설을 날라주는 매개체를 의미한다.

작은 창에서는 책을 펼친 소녀가 고양이를 곁에 두고 밖을 내다보고 있다. 박상희 작가가 만든 ‘급수탑에서 삼국유사를 펼치다’라는 작품이다. 창밖으로는 아직 완전히 겨울 분위기를 벗지 못한 넓은 밭에서 머리를 내밀고 있는 푸른 마늘의 모습이 보인다. 물론 봄, 여름, 가을이 되면 창을 통해 내다보는 그림은 지금과 상당히 달라진다.

급수탑에서 나와 논길을 따라 걷는다. 군위군이 화본역을 찾는 관람객을 위해 산책로로 만들어놓은 곳이어서 길은 걷기 쉽게 평탄하고 부드럽다. 들판은 온통 마늘 천지다. 겨우 땅을 뚫고 나온 마늘종은 마치 갓 태어난 병아리 무리처럼 종종거리며 눈을 이리저리 돌린다. 겨우 세상 구경을 한 그들의 눈에 아직 갈색뿐인 주변은 낯설고 두렵게 보일지도 모르겠다.

논길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화본마을로 들어간다. 특별한 곳이 없는 단순한 시골마을이다. 자동차는 물론 지나다니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든 곳이다. 화본역에서만 시간이 멈춘 줄 알았더니 이곳도 마찬가지다. 여기에서 웅장하고 아름답고 거창한 ‘무엇인가’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그냥 평소에 보기 힘든 한적한 시골마을 한가운데를 느긋하게 걸어보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편안하고 평화로운 것인지는 직접 체험해봐야 알 수 있다.

화본역 바로 앞에는 ‘역전상회’가 보인다. 혜원이 어릴 적 친구 은숙과 사탕을 먹으면서 재화의 사랑을 놓고 ‘정정당당한 대결’을 선포한 곳이다. 그래서 이 가게 앞의 테이블에 앉아 영화 속의 한 장면을 연출하려는 젊은이도 적지 않다.

이제 영화의 환상에서 벗어나 거친 현실로 돌아갈 시간이다. 먼 길을 달리기 앞서 시골마을 한가운데에서 이색적인 고기국수 한 그릇을 맛본다. 국수에는 도시에서는 맛보기 힘든 평온함이 따뜻하게 흐르고 있다. 든든한 배 만큼이나 마음도 푸근해진다.

글·사진=남태우 선임기자 leo@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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