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말 광] <950>언론 덕, 언론 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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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원 교열부장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3주가 지나면서 수많은 사상자가 나왔다. 두 나라 군인과 시민들이 목숨을 바쳐 가면서 “가장 나쁜 평화라도 가장 좋은 전쟁보다 낫다”(베트남 소설가 바오닌)는 사실을 보여 주는 중이다. 전쟁은, 이겨도 지옥이다.

그런데 교열기자가 보기에는, 이번 전쟁에서 우리나라 언론도 꽤 색다른 태도를 취했다는 생각이 든다. 그 불씨는 러시아가 침공한 며칠 뒤 주한 우크라이나 대사관이 살려 냈다. 우크라이나 수도 ‘키예프’는 러시아식 표기여서 우크라이나식인 ‘크이우’로 써야 한다고, ‘리보프, 하르코프, 드네프르, 루간시크’는 ‘르비우, 하르키우, 드니프로, 루한시크’로 써야 한다고 SNS에 올린 것.

한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우리 언론이 거의 ‘일사불란’이라는 표현을 써도 될 정도로 우크라이나 대사관이 제안한 표기를 곧장 쓰기 시작한 것. 바뀐 지 한참 된 ‘호찌민, 믈라카, 에스와티니왕국’ 대신 아직도 ‘호치민, 말라카, 스와질란드’로 쓰기도 하는 우리 언론이, 외래어 표기법 심의가 이뤄지기도 전에 러시아식 지명을 우크라이나식으로 바꾼 것이다.

이어 국립국어원이 부랴부랴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와 공동 운영하는 정부·언론 외래어 심의 공동위원회를 열어 우크라이나 지명 한글 표기안을 심의, 3월 10일 그 결과를 누리집에 공개했다.

관행적으로 써 온 러시아어식 표기와 새 우크라이나어 지명들, 그러니까 ‘하리코프/하르키우, 키예프/키이우, 리보프(리비프)/르비우, 도네츠강/시베르스키도네츠강’을 함께 쓸 수 있도록 한 것. 기존 표기를 버리고 바로 새 표기만 사용하게 되면 언어생활에 혼선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당분간 함께 사용할 수 있도록 한다는 설명이 따랐다. 어쨌거나 결과를 놓고 보자면, 언론이 적극적으로 나선 덕에 외래어 표기가 바뀐 셈이 됐다.

하지만, 그래도, 참 바뀌지 않는 게 우리 언론이다. 이를테면 ‘윤석열 당선인이 남대문시장 상인회 관계자들과 오찬을 함께 했다’는 기사. 아니, 도대체 ‘오찬을 했다’ 대신 ‘점심을 먹었다’고 하면, 무슨 불경죄에 해당하기라도 하는가. ‘문재인 대통령의 경남 양산 사저’는 ‘문재인 대통령의 경남 양산 집’이라고 하면 엄청나게 큰 잘못일까. ‘조찬’ 대신 ‘아침’, ‘회동’ 대신 ‘만남’이라고 쓰면 혹시 독자들이 못 알아보기라도 하는지…. 게다가 ‘옹립, 독대, 역린’같이 왕조시대 때나 쓰던 말을 아직도 우리 언론은 즐겨 쓴다.

한데, 가만 보면 쉬운 순우리말 대신 무게 잡는 한자말을 쓰는 건 대개 정치 분야인 걸 알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리 정치가 너무 진지해지고 일상에서 멀어진 것도 혹시 언론 탓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jinwoni@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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