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정의 월드 클래스] 선의 평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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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팀장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후 양측의 회담 논의가 처음으로 오갔던 날 밤, 잠을 잘 이루지 못했다. 좋은 소식이 그새 나올까, 새벽에 몇 번이나 깨 뉴스를 확인했고 아침에 눈 뜨자마자 기대감에 부풀어 또 외신을 찾아봤다. 하지만 잠 못드는 밤은 21일째 이어지고 있다.

말로만 들었던 전쟁은, 말 그대로 참혹했다. 인간을 더 고통스럽게 죽이기 위한 대량살상무기인 진공폭탄, 집속탄, 백린탄은 뭐가 더 무자비한지 다투기라도 하듯 우크라이나 땅에 연이어 떨어졌다. 피투성이가 된 아이가 눈 앞에서 죽어가는데도 온몸으로 피를 받아내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던 아버지, 산부인과 폭격으로 골반이 으스러지고 엉치뼈가 빠지는 아픔 속에 아기를 출산했지만 결국 아기도 잃고 자신도 숨진 산모 소식에는 가슴을 두들겨맞은 것처럼 아팠다.

눈 앞에서 뻔히 참사가 일어나는 데도,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무력감은 2014년 세월호 때를 떠올리게 했다. 전쟁은 우크라이나만 후려갈긴 것이 아니었다.

전쟁은 인간 바닥에 있는 감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잔인함과 탐욕, 이기심을 끄집어냈다. 언젠가 나도 가져봤을 법한 인간의 감정이란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하지만 다행히도 전쟁은 또다른 인간의 바닥 감정, 잊고 있었던 가치도 함께 일깨웠다.

외국에 있던 우크라이나인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스스로 총을 들었고, 이들은 누가 봐도 질 것 같았던 싸움에서 21일째 항전을 이어오며 진정한 승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다. 탱크에 맨손으로 맞섰고, 핵발전소 공격에 맞서서는 맨몸으로 바리케이드를 쳤다. 우리는 그들로부터 ‘용기’를 배웠다.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 국가들은 너도 나도 문을 열어 우크라이나 피란민을 맞았다. 왜 그런지 모르겠지만 자신도 모르게 호텔을 비워 피란민들에게 내어주고 있다는 한 폴란드인처럼, 생명의 존엄성 앞에서 ‘연대’를 보여주는 이들은 세계 곳곳에 존재했다. 이들 덕분에 폴란드 난민촌에 울려퍼지는 존 레넌의 ‘Imagine’이 비현실적이지 않다.

어디로 붙잡혀 갈지 모르는 공포에도 거리로 뛰쳐나와 ‘푸틴’을 규탄하고, 방송 중 난입해 거짓말을 믿지 말라고 외치며, 나라가 부끄럽다며 여권을 불태워버리는 러시아인들로부터는 ‘양심’을 배웠다. 이번 전쟁 뒤에는 이 같이 평범한 이들의 선의 집합, ‘선의 평범성’이 오래 기억되기를 바란다.

스웨덴은 83년간 지켜온 국제 분쟁에 무기 제공 금지 원칙을 깨고 무기를 지원했고, 뉴욕타임스는 철통같은 원칙을 깨고 참혹한 시체 사진을 1면에 실었다. 모든 지켜오던 가치들이 흔들리고, 깨부서지고, 다시 정렬하는 이 밤. 잠 못드는 밤이 제발 오늘이 마지막이면 좋겠다.

yourfoo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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