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원 칼럼] 내 삶을 바꾸는 지방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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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설실장

‘깜깜이’도 이런 ‘깜깜이 선거’가 없다. 18일로 75일 앞으로 다가온 6·1 지방선거 말이다. 두 달 보름쯤 남았지만 뭐 하나 제대로 가닥을 잡은 게 없다. ‘0·73%포인트 차 승부’로 결론이 난 제20대 대통령선거 전에는 그렇다 하더라도 승자가 가려진 지 일주일이 지났지만 지방선거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지방선거 시간표만 있고 선거구, 후보, 공천 방식도 보이지 않는 ‘역대급’ 깜깜이 선거다.

선거일 180일 전인 지난해 12월 1일까지 끝냈어야 할 광역의회·기초의회 선거구 획정은 법이 정한 시한 따위는 무시한 채 여태껏 감감무소식이다. 국회의 명백한 직무유기다. 선거구라는 기본적인 판이 없으니 후보도 공약도 설 자리가 없다. 지역 유권자들은 중앙정치의 볼모로 꼼짝없이 잡혀 있다. ‘풀뿌리’라는 지방선거까지 중앙정치의 입맛대로 좌지우지되고 있는 꼴불견 정치 현실이 적나라하다.

75일 앞으로 다가온 6·1 지방선거
선거구·후보·공천방식 ‘깜깜이’
중앙정치 예속된 지방 현실 참담

정치혁신 없이는 지방자치 불가
이번 선거는 중앙정치 심판의 장
정당 아닌 인물 중심 투표 절실


대권 놀음에만 정신이 팔렸던 더불어민주당과 국민의힘 ‘거대양당’은 다음 주에 가서야 지방선거 몸풀기에 나설 참이다. 기초단체장과 광역·기초의원 예비후보 등록이 지난 2월 18일 시작되었지만 ‘대선 전 선거운동 금지령’에 묶여 면면은 베일에 가렸다. 3·9대선이 끝나자 후보들 모습이 하나둘 거리의 현수막에 등장하고 있으나 ‘게임의 룰’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대선에서 승리한 국민의힘은 내주 공천관리위원회를 가동하며, 대선 패배로 내홍을 겪는 비대위 체제의 민주당도 내주 새 원내대표를 뽑은 뒤 공천관리위를 띄운다고 한다.

‘양강’이 내주 공천관리위를 각각 가동한다 해도 지방선거의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경선하겠다는 건지, 전략공천을 하겠다는 건지 당별로 오락가락한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에서 선거구 획정 협상도 벌여야 한다. 민주당이 대선 전 의원총회를 통해 제시한 ‘기초의원 중대선거구제’ 등 정치개혁안이 이번 선거부터 적용될지 관심사다. 정의당 등에서 ‘다당제 민주주의’ 약속을 지키라고 압박하지만 정개특위의 결론이 어떻게 날지는 두고 볼 일이다.

여기다 남은 시간도 지방선거에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선거를 3주 앞둔 5월 10일 윤석열 정부가 출범한다. 시기적으로 지방선거전이 달아올라야 할 지금도 모든 게 안갯속에 가려 지리멸렬한데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출범, 국정 청사진 제시, 정부·청와대 인선, 대통령 취임식 등 순차적으로 등장할 거대 이슈에 가려 지방선거 열기가 식을 게 뻔하다.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지방선거의 처지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소멸의 위기를 겪는 지방의 운명과 어찌 그리 딱 맞아떨어지는지 한숨이 절로 나온다. 중앙정치에 깊이 예속된 지방정치의 독립과 부활이 절실하다 못해 처절하게 요구되는 지경이다. 풀뿌리 민주주의의 주권을 지방주민에게 온전히 돌려주는 것, 정치혁신의 필요성은 목전에 둔 지방선거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991년 부활한 지방자치제가 만 30년을 꼬박 채우고 이제 제8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맞았지만 ‘깜깜이 선거’ ‘묻지 마 선거’라는 악명 혹은 오명은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리 동네 살림을 맡을 지역 일꾼이 어떤 인물인지, 정책은 어떤 걸 내놓았는지 묻고 따져 볼 겨를조차 없었기 때문이다. ‘기초선거 정당공천제 폐지’ 같은 혁신안이 없지는 않았지만 중앙정치의 이해관계에 따라 번번이 좌절되었다.

‘정치혁신 없이는 지방자치도 없다’는 게 냉엄한 우리 정치 현실이다. 지방자치의 적은 다름 아닌 중앙정치였다. “지방선거 공천을 매개로 금품을 요구하는 사람, 또는 금품을 제공한 사람을 아는 분은 제보해 주시면 제보자의 신상을 보호하면서 철저하게 밝혀내고 당내에서 최고 수준의 징계로 징벌하겠다”라는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의 최근 발언에서 일그러진 지방선거의 단면이 잘 드러난다.

이번 지방선거는 중앙정치에 대한 심판이자 단죄의 장이어야 한다. ‘4류 수준’에 머무는 한국 정치를 바꾸는 개혁과 혁신의 첫걸음이어야 한다. 이번 선거에서 정당에는 아예 눈도 주지 말고 오로지 후보와 정책만을 보고 투표할 필요가 있다. 중앙정치 예속의 끈을 잘라 내야 소멸 위기에 놓인 지방이 되살아난다. 지방의 풀뿌리 민주주의가 살아나면 권력 다툼에만 혈안인 국내 정치도 정상화의 길을 찾게 된다.

지방선거는 대통령선거, 국회의원선거와는 차원이 다르다. 발 딛고 살아가는 ‘지금 여기’ 내 삶의 조건과 환경을 직접 바꾸는 선거이기 때문이다. 투표가 생활이 되고 곧 삶이 되는 생활밀착형 선거이자 생존형 선거다. 지방의 삶이 중앙정치에 더는 이리저리 휘둘리도록 놔둬서는 안 될 일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데 지방자치 30년을 넘겼으니 이제 지방정치가 제대로 뿌리를 내려야 하지 않겠는가. 지방 유권자의 분발이 필요한 때다. forest@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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