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커피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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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비(커피)의 쓴맛이 좋다. 왕이 되고부터 무얼 먹어도 쓴맛이 났다. 한데 가비의 쓴맛은 오히려 달게 느껴지는구나.” 구한말 고종이 커피로 독살당할 뻔한 실화를 바탕으로 2012년 3월 개봉된 영화 ‘가비’에서 고종이 커피를 두고 한 대사다. 이게 사실이라면 고종은 커피의 쓴맛에 뒤섞여 있는 오묘한 맛을 알았던 모양이다. 실제로 고종은 커피를 즐겨 마신 애호가였다고 한다. 궁중 다례 의식에서조차 커피를 사용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는 고종이 일국의 제왕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지, 일반 백성은 커피 구경조차 어려웠다. 일제 시대 때에도 커피값은 매우 비쌌다. 당시 커피 한 잔은 10~15전이었는데, 조선인 남자 노동자의 일당이 대개 60~80전이었다고 한다(강준만·오두진 <고종, 스타벅스에 가다>). 색깔은 시커멓고, 맛은 쓴 데다 시금털털한 느낌마저 드는 커피가 조선 사람의 입맛에 맞았을까 싶지만, 어쨌든 커피는 아무나 마실 수 있는 음료가 아니었다.

1960년대 말 근대화가 일정 궤도에 오르면서 커피는 점차 일반 대중의 기호품으로 자리 잡았다. 커피 대중화의 진원지는 바로 다방이었다. 다방에서 커피를 마시는 모습은 1968년 자매 그룹인 ‘펄 시스터즈’가 부른 히트곡 ‘커피 한 잔’에도 묘사될 만큼 흔해졌다.

대중화의 길로 들어선 커피는 이후 변신을 거듭했다. 캔커피, 병커피 등으로 분화하면서 대중의 입맛을 더욱 파고들었고, 21세기 들어 우리 국민이 가장 애용하는 음료로 등극했다. 그사이 쇠퇴한 다방의 빈자리는 차별화한 맛을 내세운 커피 전문점들로 완전히 대체됐다. 한국인에게 커피는 이제 기호품이 아니라 하루라도 없으면 안 되는 필수품이 된 것이다.

커피가 국민 음료가 되면서 커피 수입액은 지난해 사상 처음 1조 원을 넘었다고 한다. 20년 전보다 약 13배나 급증했다. 커피 음료점은 지난해 8만 3000여 개로, 4년 만에 2배 가까이 늘었다. 편의점보다 3만 4000여 개, PC방보다는 약 9배나 많은 수치다. 가히 ‘커피의 나라’라고 해도 될 정도다.

특히 전국 생두의 90% 이상이 들어 오는 부산은 스페셜티 커피 분야에선 이미 최고로 평가받고 있을 정도로 커피 친화적인 도시다. 전국에서 처음 추진 중인 커피산업 육성 조례가 이를 보여 준다. 부산이 안팎의 이런 흐름을 더욱 잘 파악해 활용해야 하겠다.

곽명섭 논설위원 kms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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