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물썰물] 공항 멸치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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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미나리’. 어린 외손주들을 돌보기 위해 한국에서 미국 깡촌 아칸소로 간 외할머니(윤여정 분). 공항에서부터 이고 메고 온 짐보따리를 풀어 보니 외손자를 위한 한약과 함께 마른멸치와 고춧가루, 미나리 씨가 들어 있다. 밥심으로 사는 한국인에게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마른멸치와 고춧가루’는 감독이 한국적인 어머니와 집밥을 연상시키기 위해 삽입한 매개체다.

특히, 멸치는 한식의 기본인 김장김치에 필수적이다. 경남과 남해안에서는 따뜻한 날씨로 김치가 과발효하는 것을 막기 위해 소금간을 짜게 해 장독에서 잘 삭힌 뒤 삼베로 걸러 낸 멸치액젓으로 김장을 한다. 서울·경기 지역은 담백한 맛을 내는 새우젓을 주로 쓰지만, 교통이 발달하고, 남해안 출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멸치액젓을 많이 찾고 있다.

이맘때면 남해안 인근에서는 생멸치회와 생멸치찌개가 제철 음식이다. 한국인의 밥상에선 멸치는 조림 등 밑반찬부터 시작해 육수나 찌개의 깊은 감칠맛을 낼 때 사용한다. 멸치의 국민 1인당 연간 소비량은 4.2㎏. 한국인이 가장 많이 먹는 수산물 3위(농촌경제연구원 집계)다. 아파트로 주거 여건이 바뀌기 전에는 어느 집이건 멸치젓을 담는 장독이 있었다. 멸치가 한국만의 것은 아니다. 고대 로마군은 발효생선 천연 조미료인 ‘가룸’을 먹으면서 전쟁을 치렀다고 한다. 가룸은 지중해 ‘안초비 소스’의 원조다. 베트남 등에서도 멸치액젓인 ‘느억맘’이 음식의 감칠맛을 보장하는 국민 소스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생태계에서 멸치의 역할은 너무나도 크다. 먹이사슬에서 플랑크톤 다음이라, 멸치의 풍흉에 따라 갈치, 농어, 고등어, 다랑어, 고래 등 바다의 포식자 자원량에 영향을 미친다. 어부들은 그래서 멸치 어황에 민감하다. 인간과 바다 생태계를 지탱하는 생존 기반이기에 잡아먹히기 위한 멸치의 생명은 결코 하찮을 수 없다.

최근 가덕신공항 건설 계획이 확정되면서, 서울 언론들이 진보·보수 가리지 않고 ‘멸치 말리는 공항’이라고 조롱하고 나섰다. “서울을 빼고는 모두 시골”이라는 망국적인 우월감과 탐욕, 기득권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이 안쓰럽다. 멸치가 없으면 고등어도 고래도 인간도 살 수 없다. 지역이 소멸하면 서울도 대한민국도 생존할 수 없다. 마침 오는 20일부터 부산 기장 대변항 멸치축제가 3년 만에 다시 열린다고 하니, 그물에서 하늘로 튕겨 올라가는 은색 멸치에게 ‘공생의 지혜’를 물어보면 어떨까?


이병철 논설위원 peter@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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