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 尹의 '반지성' 비판, 野 발끈할 일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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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훈 서울정치팀장

‘반지성주의’라는 화두를 담은 윤석열 대통령의 지난 10일 취임사가 야권의 감정선을 건드린 듯하다. 급기야 ‘잊혀진 사람이 되고 싶다’던 문재인 전 대통령까지 양산 사저 주변의 보수 집회를 겨냥해 “반지성이 작은 시골마을의 평온과 자유를 깨고 있다”는 글을 SNS에 올렸다. 해당 문장과 잘 어울리지 않는 ‘반지성’이라는 표현을 굳이 끼워 넣은 의도가 보인다. 윤 대통령은 당시 취임사에서 민주주의 위기를 언급하면서 “각자가 보고 듣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를 핵심 원인으로 지목했다. 그러자 ‘다수의 힘’에서 지레짐작한 ‘다수당’ 더불어민주당이 “윤 대통령에게 가장 결핍된 언어가 ‘지성이다’” “자기 모습부터 돌아보라” 등 가시 돋친 반응을 쏟아내고 있다. ‘뼛속까지 검찰주의자’ ‘무속 대통령’이 감히 지성을 운운하느냐는 투다.

사실 ‘좋은 말 대잔치’인 취임사에 반지성주의라는 낯선 단어, 자유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담은 건 적잖이 튀어 보였다. 먼저 드는 생각은 ‘윤 대통령이 대부분 직접 썼다는 말이 허언이 아니었구나’였다. 윤 대통령이 대선 때부터 단편적으로 밝혀왔던 문제 의식, 세계관이 16분짜리 짧은 취임사에 분명하게 드러났다. 사생결단식 진영 대결 끝에 권좌에 오른 윤 대통령이 취임사 앞머리에 합리적 소통의 부재에 따른 민주주의의 위기를 당면 현안으로 짚은 것은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SNS 발달에 따른 확증편향과 가짜뉴스의 범람이 민주정치 시스템을 뿌리째 흔들고 있다는 문제 의식은 최근 수년 새 세계 공통의 화두로 떠올랐다. ‘조국 사태’ 이후 진영주의가 극단화된 우리 사회에서도 당연히 중요하고 시급하게 다뤄야 할 문제다.

文까지 참전한 尹 ‘반지성주의’ 공방
진영 대립 따른 민주정 위기 세계적 화두
새 정부 들어서도 대립 극심한 여야
‘네 탓’ 대신 적대적 문화 개선 나서야

윤 대통령은 반지성주의의 해법으로 과학과 진실을 전제로 한 합리주의를 제시했다. 내 나름대로 쉽게 풀자면 쟁점마다 마치 두 개의 사실이 존재하는 듯 진영적 사고가 만연한 현실에서 적어도 과학으로 입증된 사실이나 권위 있는 기관의 결론에 대해서는 인정하고, 그 기반 위에서 절충점을 찾아야 한다는 것으로 이해했다. 윤 대통령의 의도가 통합을 위해 진영 간에 최소한의 인식의 교집합이라도 만들자는 취지라면 충분히 수긍할 만하다. 그런 점에서 반지성주의자가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았음에도 민주당이 보이는 격한 반응은 어딘가 허를 찔린 듯한 느낌마저 든다.

많은 이들이 반지성적인 진영정치의 극단화에 대해 구 여권과 그 팬덤 세력의 책임을 거론한다. 권력과 다수의 힘으로 이전의 상식과 관행을 무시로 허물었기 때문이다. 조국 사태에서 그 정도 흠이 드러나면 물러난다는 상식을 거부해 나라를 두 쪽으로 갈랐다. 정권의 턱밑을 겨냥한 수사에는 수사팀을 해체하는 전례 없는 대응으로 맞섰다. ‘꼼수 탈당’ ‘회기 쪼개기’ 등 각종 편법을 동원해 국회선진화법을 형해화시켰다. 국가 기관의 권위가 무너지니 이젠 법원의 최종심마저 판사의 출신·성향에 따라 판결의 신뢰를 저울질하는 일이 그다지 이상하지 않은 사회가 됐다.

그럼에도 비정상적인 분노에 포획된 우리 정치의 반지성적인 행태가 단기간에 사라지길 기대하는 건 무망해 보인다. 지난 10일 김건희 여사를 만나 웃음을 터트린 민주당 윤호중 비상대책위원장에 대해 “좋아 죽겠냐”는 지지층의 맹렬한 비난, 그에 대한 윤 위원장의 반응은 이를 상징한다. 불구대천의 원수가 아닌 다음에야 대통령 취임식 축하 자리에서 웃는 모습조차 용인할 수 없다는 태도는 이해하기 어렵다. 그리고 책임 있는 정치인이라면 “그 순간이 포착된 것뿐이다. 당원들 마음을 이해한다”가 아니라 “그런 적대적인 태도는 옳지 않다. 비판할 땐 비판하고, 축하할 땐 축하하는 게 맞다”고 용기 있게 지적했어야 하지 않을까? 하긴 정치적 중립 의무를 지닌 국회의장 출마자가 “민주당 정신으로 윤석열 정부와 맞서겠다”는 말을 버젓이 하는 당 상황이니….

물론 반지성주의에 대한 지적은 윤 대통령 측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절대 다수가 노회한 관료와 검사 등 엘리트 위주에, 낡은 성 인식을 드러낸 인물들까지 별 문제 의식 없이 중용한 초기 인사는 윤석열 정권의 ‘지성적인’ 권력 운영에 대한 기대감을 현저히 낮췄다. 덧붙여 조국 가족의 입시 비리 문제를 탈탈 턴 한동훈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명백해 보이는 자녀의 ‘스펙 쌓기’ 행태에 대해 한 점 부끄러움 없다는 듯한 태도를 보이는 것도 반지성적 진영 대결을 부채질할 뿐이다. 반지성주의에서 자유로운 정치 세력은 없다. 다만 반지성을 부추기는 세력이 누구인지, 반대로 이를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세력이 누구인지 양식 있는 국민들은 지속적으로 판단하고, 또 심판할 것이다. jch@bus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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